리뷰ㅣ목소리 프로젝트 음악극 ‘태일’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음악극 ‘태일’이 지난 6일부터 13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천공의 성’에서 공연됐다. ‘태일’은 2017년 11월 13일로 서거 47주기를 맞은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과거 실존 인물의 자료를 공연 형식으로 표현하는 ‘목소리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인 이 공연은 『전태일 평전』(1983)을 비롯한 전태일 열사와 관련된 기록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항상 괴로운 마음과 몸, 떨어진 신발에 남이 입다 버린 헌 때 뭉치 옷을 입어야 하나? 누구 하나 그 소년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이 없다. 계속해서 걷고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이야기는 배우의 내레이션과 태일의 일화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주인공 태일이 피아노와 기타 반주 위로 ‘소년의 의문’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시작된 공연은 “여러분은 태일이란 인물에 대해 어떻게, 또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라는 배우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는 잠시 배역에서 벗어나 “작품을 준비하며 전태일이란 사람이 마냥 뜨겁기만 했던 투쟁가보단 옆집에 살 것 같은 따뜻한 청년으로 느껴졌다”며 “그래서 우리는 오늘 ‘태일’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라고 관객들에게 설명했다.

작품은 ‘뜨거웠던 전태일 열사’보단 ‘따뜻했던 청년 태일이’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했다. 공연의 제목이 ‘전태일’이 아닌 ‘태일’인 이유다. 태일은 한때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녔던 평범한 학생이기도 했고, 돈을 벌기 위해 ‘시다’로 공장에 들어간 평범한 노동자였다. 어린 태일이는 첫 출근 날만큼은 깨끗한 모습으로 집을 나서고 싶고 학교 체육 대회에선 달리기 꼴찌를 하기도 하는 특별해 보이지 않는 삶을 이어간다.

이후 태일은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집 밖을 나와 힘겹게 돈을 번다. 그러던 중 그는 경제적인 이유로 헤어져야만 했던 어머니를 다시 만나 어머니 친구의 집 마루 밑에서 함께 잠을 청한다. 잔잔하고 소박하면서도 애달픈 태일의 이야기를 들으며 관객들은 배우들과 함께 울고 웃길 반복한다. 태일의 가족, 친구, 동료 등 일인다역을 맡은 김국희 배우는 “태일이가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특별한 힘을 가진 영웅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그래서 학창시절의 체육 대회나 죽기 전 첫사랑을 만나는 것 같은 우리 삶의 일상적인 장면을 담아냈다”고 에피소드의 나열과 잦은 내레이션으로 공연이 이뤄진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태일 역을 맡은 박정원 배우는 “마지막 장면을 비롯한 특정 대목에 비중을 두는 것보다도 같은 사람으로서의 태일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주목했다”고 덧붙였다.

극 중 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피복 공장 견습공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자신의 식비와 교통비를 털어 풀빵을 사다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그려진다. 열두세 살쯤 된 어린 소녀들이 하루에 열네 시간씩, 한 달 내내, 그것도 먼지 구덩이 작업장 속에서 매를 맞아가며 일하는 게 계속해서 의문인 태일, 관객석을 보며 외친다.

“다 같은 인간인데 와? 우째서?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아들이 때 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돼야 합니까?”

그래서 태일은 노동자의 편에 서는 재단사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재단사가 되고서도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왜 밑바닥 인생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결국 태일은 낮이면 재단사 친구들을 찾아 뜻을 모으고 밤이면 『근로기준법서』를 공부하는 사람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일은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 기계처럼 일만 하다 죽느니 사람답게 사는 바보로 살자’는 마음으로 ‘바보회’를 창립한다. 그는 자비를 들여 노동실태 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돌리고 이를 근로감독관에게 전하지만 감독관은 그에게 모욕만을 줄 뿐이었다. 그래도 노동청 앞에서 마주친 출입 기자의 도움으로 1970년 10월 7일 시내 각 석간신문에는 평화시장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릴 수 있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잠시나마 문제 개선의 의지를 보였으나 결국엔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게 된 태일은 악을 쓰며 근로기준법을 읊는다.

무대는 암전되고 공연장엔 1953년 5월 10일에 최초로 제정된 근로기준법 낭독음성이 흘러나온다. 그동안 배우들은 후원받은 초를 하나씩 꺼내며 마지막의 그를 기리는 목소리를 얹어나간다. 극 중 태일의 마지막은 강렬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관객을 바라본다. 그리곤 무대 뒤로 사라지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노동자들의 목소리 속으로 뛰어든다.

음악극 ‘태일’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 제작진들 모두가 무보수로 공연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에서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되는 여러 개의 초는 40명의 사람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마련됐다. 마지막 장이 시작되기 전 암전된 무대로 흘러나오는 근로기준법 낭독 목소리는 연극 ‘밀레니엄 소년단’의 후원으로 채워졌다. 공연장의 하우스 어셔*도 매일 달라졌다. 음악극 ‘태일’에 목소리를 보태고자 대학로 배우들이 발 벗고 나서 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개막 전 공개된 영상에서는 음악극 ‘태일’과 그 뜻을 함께하기 위해 공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5명의 배우가 전태일 평전을 낭독하기도 했다. 8일 공연을 관람한 전태일 재단의 박계현 사무총장은 “전태일의 삶이 이토록이나 생동감 있게 전달될 수 있어 감동적”이라며 “현대 사회에서도 그의 ‘풀빵 정신’을 구현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관객 유승주 씨(21)는 “공연을 보기 전에는 음악극 ‘태일’이 ‘영웅적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정적인 전태일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며 “공연을 통해 전태일의 정의로운 모습만이 아닌 평범한 모습 또한 알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최미미 씨(30)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국민이자 노동자로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며 “음악극 ‘태일’을 통해 그분의 넋을 기리고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80분이었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서거일이었던 13일 공연에서 태일의 책상 위에 국화꽃을 올려놓는 것으로 공연은 막을 내렸다. 음악극 ‘태일’이 전하고자 했던 건 따뜻했던 사람 전태일이 남기고 간 희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는 우리와 같이 웃고, 울고, 화나고, 슬퍼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굉장한 ‘영웅’이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을 이 세상에 남기고 떠난 그를 기리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따뜻한 사람들인지, 세상은 그때보다 더 따뜻해졌는지를 되돌아본다. 내일이 되면 행복해질 것이란 희망으로.

*하우스 어셔: 공연장 로비와 객석 등에서 관객들을 안내하는 사람. 주로 티켓 확인과 입장, 좌석 안내, 공연장 내 에티켓 공지 등을 담당한다.

삽화: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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