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 평론

예정된 시간의 도착

추운 겨울, 브루타뉴의 그랑베섬으로 향하는 여객선의 선실에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배가 일렁이는 탓에 그녀를 잡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같은 높낮이로 흔들리면서도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그녀의 손에는 손글씨로 쓰여진 레포트가 놓여있다. “남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 그녀는 곧 파일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가족들과 섞인다. 하지만 뒤에서 슬며시 다가와 그녀를 옆에서 내려다보던 카메라는 이제 그녀가 이동하는 모습을 따라 고개를 돌리듯이 바라본다. 이후로도 카메라는 관조하듯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패닝(panning)하며 그녀의 곁에 머문다. 마치 먼 미래의 어떤 시점이, 즉 당도해야만 했던 예정된 시간이 비로소 그녀에게 다가온 것처럼. 하지만 나탈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뭍으로 가는 길이 끊기기 전에 황급하게 바닷길을 건너는 아이들이나 그녀와는 달리 섬에 놓인 샤또 브리앙의 묘지를 좀 더 보겠다며 한사코 그곳에 남는 남편의 마음을. 묘지와 그 너머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완고한 뒷모습의 그에게도 선택이라는 기로에 놓이게 되는 운명적인 시점이 이미 당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남편이 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하면 화면의 왼쪽 상단에 비로소 이 영화의 타이틀 크래딧 “L’AVENIR(Things to come)”가 등장한다. 불어 원제는 ‘미래’라는 뜻으로 좀 더 직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들에게는 미래가 당도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오프닝 시퀀스는 이제 곧 나탈리에게 많은 일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들이닥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급진적인 패배자

몇 년 후, 중년의 나탈리는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두 남매를 둔 엄마, 같은 전공의 남편을 둔 아내이자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돌보고 있는 딸의 역할로 살고 있다. 늘 풍성한 꽃들과 많은 책들에 둘러싸여 살며 직접 선집한 철학 총서도 가지고 있어 지식인으로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적층은 변화를 가져오고 이 모든 상황은 그녀를 당황스럽게 한다.

과거 젊은 시절 스탈린주의에 공명했던 나탈리였지만, 연금 개혁 반대 시위를 하는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강의를 들어가는 자신을 저지하자 불쾌해진다. 게다가 그녀의 책들은 출판사로부터 ‘덜 근엄하고 더 매력적인 책들’로 바꾸자는 제안을—가장한 통보를—받게 되고, 곧이어 퇴출 통보까지 받게 된다. 가장 압권은 남편이 갑작스레 외도를 고백하고 이혼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까 ‘딸’이나 ‘엄마’라는 변화 불가능한 역할이 아닌 ‘선생’ ‘지식인’ ‘아내’처럼 그녀가 좀 더 의지적으로 수행했던 책무들이 나이듦이라는 상황 아래 위협을 받게 된다.

늘 그랬듯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 죽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엄마를 달래러 갔다가 출근하는 길에 나탈리가 읽고 있는 책은 앤첸스베르거의 『급진적인 패배자』다. 책의 실제 내용과는 상관없이, 68혁명 시기에 학생들에게 강단에서 조롱당하고 충격을 받았던 아도르노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이 제목은 갑작스런 변화들로 큰 난관에 빠지게 된 나탈리의 현재 모습과도 겹쳐진다. 요동치는 시간 앞에 선 한 여자가 여기 실의에 빠져 있다.

시간의 중력

이 영화 내러티브의 한 축은 사제 관계다. 젊은 여자와의 사랑을 선택한 남편이 그녀의 생물학적 노쇠함을 일깨웠다는 데서 충격을 줬다면, 파비앵은 정신의 가치론적인 측면에서도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파비앵은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그녀의 충실한 제자다. 나탈리가 파탄난 자신의 결혼에 대해 알린 첫 번째 타인이자 자신의 감정적 동요를 유일하게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탈리가 파비앵과 그 동료들의 대안 공동체인 산채에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그녀가 원칙주의를 따르는 부르주아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나탈리는 파비앵의 말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자신은 혁명 대신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가르치려 했을 뿐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자신의 방에 돌아온 나탈리는 침대에서 오랫동안 흐느낀다. 두 사람의 시간의 중력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1년 후, 나탈리는 강의를 통해 행복을 대신해서 가상적 만족이 진정한 위안이 되고 관능적 쾌락마저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듯 보인다. 그리고 파비앵의 산채를 다시 찾은 나탈리는 이제 자신의 얘기 대신 그의 얘기를 듣는다. 파비앵은 잘 살고 있다고 대답하지만, 카메라는 그녀를 기차역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다. 이제 그는 어떠한 삶을 살게 될 것인가. 괜찮다고 말했던 나탈리가 실은 괜찮지 않았던 것처럼 이상에 들떴던 젊은 제자는 조금은 지친 모습이다. 시간의 중력은 그녀를 다시 평온하게 했고 젊은이의 열정을 얼마 간 시들게 하고 있다. 파비앵이 나탈리의 나이가 될 때까지 시간이 흐르면 아마 그는 지금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시간의 중력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내러티브의 율동감

이 영화에는 아도르노나 지젝, 쇼펜하우어, 레비나스 등 많은 철학자들의 이름과 책제목들, 철학과 사변적 사유들, 가치 판단과 개념 규정의 문제들에 관한 현학적인 대화들이 등장한다. 나탈리도 감정의 바닥을 보여주는 대신 “지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잖아, 그거면 행복해”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세속적인 멜로드라마들의 비탄에 맞서는 우아한 정신세계의 승리를 보여주는 관념적 이상의 서사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서사에는 좀 더 숙고할 만한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선형적인 내러티브의 익숙한 진행을 돌연 정지시키는 방법으로 서사적 율동감을 세밀하게 만들어낸다. 나탈리가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견딜 힘과 시간이 필요한 순간들을 인정하고 자신을 다독이려는 상황에 돌입하자마자 현실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침입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광과 소음에 둘러싸인 공원에 누워서 햇빛을 쬐려 하지만, 바람에 종이들이 날라가고 그녀는 허둥지둥 일어나 종이들을 잡으러 다닌다. 버스에 앉아 울면서도 보이스 오버(Voice over)로 전달되는 『팡세』의 구절로 마음을 다잡던 그녀에게 하필 버스 차창 밖으로 남편과 그의 애인의 다정한 모습이 목격된다. 별장에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회한에 젖던 그녀가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해변의 뻘밭들을 맨발로 헤매이며 신호를 잡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또 어떤가. 쇼트에 시간을 부여하고 감정이 쌓이려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맞닥뜨리는 상황에 나탈리는 당황하고 슬픔은 유보된다.

로맨스가 생겨날 상황이 몇 번 제시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거부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은 지적인 고양으로도, 멜랑콜리적인 감정적 소여로도, 흔한 로맨스로도 나탈리의 슬픔을 해소시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관조적인 카메라는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옆을 그저 따라가면서 불가해한 인간의 삶과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의미적 중층성이자 중년 고독 따위로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는 실제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말미, 마치 성탄용 가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처리된 나탈리의 마지막은 어떻게 이르게 된 것인가. 그녀의 고통은 과연 극복된 것인가.

정지된 화면과 시간

나탈리가 엄마가 남긴 판도라를 내보내고 성탄절에 집에 나타난 전남편 하인츠를 쫓아낸 후, 집에 온 자녀들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나탈리와 그녀의 가족들을 관조하는 패닝—이 영화 내내 압도적으로 보여주던 카메라의 패닝—은 두리번거리다가 이들의 평화를 깨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난다. 어느 겨울, 여객선의 나탈리를 향해 일렁이며 다가왔던 어떤 시선은 이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 천천히 뒤로 걸으며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정지된다. 정지화면(freeze frame)으로 시간의 한 국면을 액자화 해버린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전체 주제는 달라질 것이다.

나탈리가 예기치 못한 운명의 침입을 모두 이겨내고 따뜻한 식사와 대화, 아기가 있는 가정의 삶 안에 행복을 찾았다고 보는 것은 이 영화의 섬세한 층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중산층 부르주아의 삶과 철학적 사유로 끊임없이 대체해왔던 나탈리의 삶의 중추가 또 다시 가족에게로 옮겨갔을 뿐임을 여전히 한 발 멀리서, 그리고 다소 냉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다가오는 삶의 위기 국면들을 해소하고 살아남은 중년 여성의 평온함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가 극복되지 않는 삶 자체의 고통을 겨우 왜상으로 가리고 있을 뿐임을, 그리고 결국 죽음이라는 미래를 맞이하기 이전에는 그것으로 겨우 견디어 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수향 평론가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 2013년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평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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