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샘’ 100주년, 뒤샹의 성과와 한계

현대 예술에 대해 묻는다면 사람들은 흔히 미술관 안 난해한 설치미술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설치미술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예술의 시작과 함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가 직접 만들지 않아도 예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최근부터 시작됐다. 이러한 논의의 효시는 마르셀 뒤샹(1887-1968), 그리고 그의 작품 ‘샘’(1917)이다. 1917년 뒤샹의 ‘샘’이 뉴욕에 등장한 후 100년이 지났다. ‘샘’ 100주년을 기념해 『대학신문』에서 뒤샹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품들이 남긴 영향을 되짚어 봤다.

시대를 앞서나가는 예술가

뒤샹은 보통 ‘샘’이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인상으로만 기억된다. 하지만 그는 ‘샘’이라는 작품을 낳기 이전에 인상주의부터 시작해 야수파, 입체주의, 미래주의 등 여러 미술적 사조를 수용하며 발전해나갔다.

인상주의 화법으로 첫 유화를 시작한 뒤샹은 야수파의 강렬한 그림에 빠져들었다. ‘검정 스타킹을 신은 누드’(1910)에서 야수파가 뒤샹에게 미친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뒤샹은 야수파를 통해 그림이 감정의 표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쳤지만 야수파의 진전 없는 모습에 진부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뒤샹은 당시 피카소와 교류하며 입체주의를 시도하던 형 자크 뒤샹의 그림을 보고 경의를 느꼈다. 뒤샹이 후에 “입체주의 이론은 지성적인 점에서 나를 매료시켰다”고 말한 기록에 비춰볼 때 뒤샹은 당시 입체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한창이던 미래주의 사조 또한 뒤샹의 예술세계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1910년 『르 피가로』지의 ‘미래주의 선언문’으로 예술계에서 관련 주제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울대 미술관 ‘MoA’ 정신영 학예연구사는 “너무나 무거웠던 유럽 회화전통에 억눌린 예술가들은 강력한 전환점을 기대하고 있었다”며 “이로부터 비롯된 기계에 대한 신앙은 기존의 데생법이 아닌 직선 위주의 기하학적인 접근으로 이어졌다”고 미래주의를 분석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진보적인 시도들은 전통회화의 범주 내에서 전개됐다. 결국 3차원 현실을 2차원 평면에 구현한다는 전제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샹은 이렇게 다양한 미술 사조를 체험하면서 ‘예술은 자연의 재현이 아니다’라는 사고를 발전시켜 나갔다.

(사진①)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 2’(1912), 캔버스에 유채, 89.2x147cm, 1912.
연속된 장면의 움직임을 ‘스타카토’로 쪼개 연결하듯이 그렸다.
사진 출처: 미국 필라델피아 예술박물관

위와 같은 사조들을 종합적으로 수용한 후 뒤샹이 만든 작품이 바로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1912) 연작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는 누드의 운동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다.(사진①) 그림 속 누드에 대해 정신영 학예연구사는 “뒤샹은 ‘나체는 아름답다’는 기존의 고정된 전제를 뒤집어 나체를 딱딱하고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는 충격적인 시도를 했다”며 “배경과 표현하는 대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에서 기존에 비해 획기적인 미적 전환을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뒤샹은 이 작품으로 기존 자연주의의 사슬을 영원히 끊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종래의 입체주의적 표현법을 따르지 않아 당시 입체주의 작가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조주연 강사(미학과)는 “뒤샹은 기존 작가들의 자의적 관습에 의해 결정되는 미술의 의미에 회의를 느꼈다”며 “이는 뒤샹이 회화와 멀어지는 계기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상의 샘, 예술을 묻다

(사진②) 샘, 세라믹스, 61x36x48cm, 1912.
뒤샹은 평범한 철물점에서 산 변기를 뒤집고 가명으로 서명한 뒤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 작품은 기성품에 예술가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예술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사진 출처: 미국 아이오와대 박물관

1917년 뒤샹은 뉴욕 5번가 118번지에 있는 철물점에서 변기를 하나 구입했다. 그는 이를 거꾸로 세우고 자신의 이름 대신 가명으로 ‘R. Mutt 1917’이라 서명한 후 ‘샘’이라고 명명했다.(사진②) 그리고 이 ‘작품’을 당시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에선 어떤 작품이든 참가비만 내면 전시가 가능했다. 하지만 ‘샘’은 심사위원 간의 논쟁 끝에 전시가 거부됐고 결국 ‘샘’은 전시회 칸막이 뒤에서 먼지 쌓인 채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뒤샹은 자신이 창간에 참여한 『장님』에 이 작품에 대한 옹호글을 기고했다.(사진③)

(사진③) 『장님』 창간호에 실린 뒤샹의 기고글. 뒤샹은 이 잡지에 글을 실어 자신이 가명으로 출품했던 ‘샘’을 옹호했다.
사진 출처: 미국 아이오와대 박물관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샘’의 핵심은 심미적인 내용이 아니라 감상자가 이를 볼 때 일어나는 의문이다. 정수경 강사(미학과)는 “작품의 질에 관한 의문이 아닌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예술철학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술에 대한 질문의 층위가 달라졌다”고 ‘샘’의 가치를 평가했다. 뒤샹이 『장님』에서 밝혔듯 ‘샘’을 예술가가 직접 만들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예술가가 일상의 사물인 변기를 발견하고 전시함으로써 미술계의 제도 안에 이를 끌어들었는가가 핵심이 된다. 이에 대해 김정희 교수(서양화과)는 “일상에서 쓸모 있어야 하는 변기를 뒤집어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미술세계에 끌어들임으로써 변기로서의 사용가치를 제거했다”며 “이는 ‘샘’이라는 은유적인 제목과 함께 ‘작품’을 보는 방식을 바꾸며 예술에 대한 다각적인 시각을 제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샘’이 등장한 배경엔 당대 여러 사상적 발전이 있다. 김 교수는 “예술에 대한 절대적인 관점 탈피의 바탕에는 동시대의 불가지론에 대한 논의, 아인슈타인이 증명한 상대성이론의 영향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4차원에 대한 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상대성이론의 등장은 세상이 절대적이라는 기존 관념을 허물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샹이 새로이 경험한 바가 ‘샘’의 발전에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뒤샹은 ‘뉴욕의 고층건물들보다 아름다운 것을 유럽이 보여줄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뉴욕의 도시기반시설에 감탄하고 있었다. 정수경 강사는 “뒤샹은 당시 진부했던 뉴욕 미술관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전율을 일상에서 경험했다”며 “전도된 두 가지 경험이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줬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뒤샹이 ‘샘’을 통해 제기한 의문을 분석하는 관점은 다양하다. 뒤샹은 순수예술의 관념이 규범적으로 자리 잡으며 예술과 일상이 구분되던 시기에 활동했다. 이 시기에는 예술이 일상과 분리되고 예술가의 독점적 지위가 확고해지고 있었다. 조주연 강사는 “뒤샹은 예술가를 독창적인 창조자로 신화화하는 사고를 지양했다”며 “그런 의미에서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교란하는 뒤샹의 행동엔 예술가가 가진 권능의 부조리함을 희화화하며 폭로한다는 측면도 존재한다”고 평가했다. 뒤샹은 일상용품에서 사용가치를 제거해 존재적 지위를 전환함으로써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 뒤샹의 행동은 ‘무엇이 예술인가’에 대한 인식론적 의문을 제기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해완 교수(미학과)는 ‘샘’의 제작이 1800년대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자유 확대의 흐름에서 결실을 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당시 자유를 예술의 임무로 부여하고 예술 속에서 자유를 탐구하던 경향이 흐르고 있었다”며 “자유를 추구하던 피카소와 마티스 등 수많은 작가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경계선 밖의 생각을 했다는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뒤샹, 정말로 전환을 이끌었는가

현대 미술에서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뒤샹이 과연 그 명성만큼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1917년에 예술계에 던진 중요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뒤샹이 대중에게 알려진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정수경 강사는 “1950년대에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의 작가가 인기를 끌며 그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지목된 뒤샹이 재조명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뒤샹 영향력의 근간은 작품이 아니라 후예 작가들과의 교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샘’이 발표되고 난 이후 앞서 말한 작가들이 등장하기까지 40년간 뒤샹을 잇는 작가는 없었다. 김정희 교수 또한 “뒤샹은 ‘샘’ 이후 영향력 있는 작품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뒤샹은 예술을 결정하는 미술체계의 절대적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발상의 전환점을 전달함에 그쳤다”며 뒤샹이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그는 “뒤샹이 예술의 외연을 확장했지만 결국 미술 뒤에 예술가의 선택만 있다면 작품이 될 수 있게 했다”며 “이후 형식상의 모방, 표절 시비가 나올 수 있는 작품의 양산을 야기했다”고 비판했다.

‘샘’에 대한 전설적인 평가가 합당한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이해완 교수는 “과연 뒤샹이 ‘샘’을 통해 한 시도가 의도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며 “예술을 통해 자유를 모색하던 수많은 시도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답했다. 그는 ‘샘’이 전환점이라는 사실도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후 이어진 치열한 갑론을박의 과정이라는 점을 피력했다. 또한 이 교수는 “뒤샹으로 인해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는 본질의 유무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며 예술계가 처한 혼란한 상황에 대해 지적했다. 그는 “뒤샹으로 인한 예술과 일상 사이 경계 붕괴로 인해 ‘샘’을 애초에 예술에 편입시켜서는 안 됐다’는 의견도 존재한다”고 전했다.

*앙데팡당(Independant)전: 심사가 엄격했던 기존의 살롱전에서 벗어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전시회. 심사도 시상식도 없이 소정의 참가비만으로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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