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D A
황운중(자유전공학부·14)
*
새천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나에게 아무 흥미도 주지 못했다. 사실 21세기는 2000년이 아니라 2001년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1999년의 끝무렵부터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이야기했다. 그 심보에는 분명히 새천년이라는 단어를 몹시 고깝게 여겼던 나의 삐딱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낭만이 없다는 간단한 핀잔으로 내 입을 막았고, 나는 그런 일축에 구태여 반응하고 싶지 않을만큼 충분히 무기력했다. 사람들은 불꽃놀이를 했다. 2000년 1월 1일에는 그랬다. 아끼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따서 마실만한 여력이 되는 집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대개는 삼삼오오 소줏집에 모여서 타종을 기다렸다. 십의 자릿수가 바뀌는 것도 살면서 두 손에 꼽게 보는 일인데, 가장 앞자리의 숫자가 바뀌는 것에 괜스레 모두들 들떠 있었다. 2000년 1월 1일에는 그랬다.
2000년이 가물어 가던 가을에 라디오헤드의 4집을 접했다. 세기말과 밀레니엄의 마지막을 장식한 음반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1월 1일에는 새천년이라며 폭죽을 쏘더니, 이제 오니까 또 세기말 운운을 하는군, 분명 2001년 1월 1일에도 온갖 연예인들이 나와서 “여러분, 새천년이 밝았습니다!” 하고 외치며 서로 희망찬 덕담을 주고받겠지. 심지어 그 덕담은 무려 앞으로의 천년을 기약하는 오만한 크기일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미 2000년 1월 1일에 차고 넘치도록 보았기 때문에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예측은 한 치도 빗나감이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라디오헤드의 3집을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해외 뮤지션에 대한 접근이 지금처럼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카세트를 구해서, 어머니에게 조르고 졸라 얻어낸 워크맨에 그 테이프를 넣고 돌리며 잠이 들 때까지, 잠이 깰 때까지 들었다. 톰 요크가 읊조리는 가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모든 영어 가사를 욀 수 있었다. 나의 영어 공부를 가장 도왔던 것은 그들의 음악이었다. 테이프는 종종 늘어지고 끊어져서 볼펜을 돌려서 다시 감거나, 투명 테이프를 붙여서 수선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부분은 지직거리며 끊겨 들렸는데, 그래서 나중에 원곡을 들을 때 나는 지직거리는 부분이 깔끔하게 흘러가는 것이 영 낯설었다.
입시를 마치고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다. 라디오헤드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입시를 치를 때 영어 실력을 무기 삼아 영문과를 쓴 것은 아니었다. 영어를 잘 한다고 영어영문학과를 갈 이유가 없고, 영어영문학과라고 영어를 잘 할 이유는 없으니까. 라디오헤드가 맘에 들어서 영문학과를 쓰고 싶고, 그 학과에 대강 점수가 맞으면 되는 일이다. 졸업을 하고 나면 다 고만고만해질 것을 나는 일찍부터 알았다. 라디오헤드가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가사를 듣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대학에 붙고 나는 시시껄렁하게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섹스도 하고 영어도 배우고 영어를 배우는 사람과 섹스도 하고 연애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섹스를 하고 나선 좋았느냐고 물었고 나는 심드렁하고 무기력하게 대꾸했다. 그러면 꼭 그들은 화를 내고 몇 주 후 나와 헤어지곤 했다. 2000년에 나는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는 대학교 3학년에 2000년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그 해 가을에 라디오헤드는 4집을 발매했다. <KID A> 였다.

*

-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요.

그는 내 옆에 앉으며 첫인사치고는 무례한 말을 장난스럽게 던졌다. 어릴 적부터 돌출된 나의 입은 할아버지부터 내려온 집안 내력이다. 교정을 하고도 튀어나온 앞니의 기억은 입술에 남아서, 내가 잠시 생각에 젖어있을 때면 어김없이 두 입술은 형상기억합금처럼 벌어졌다. 불쾌함을 애써 숨기고 웃었다. 아마 그가 보기엔 찡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웃음이었을 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내 앞자리로 고쳐 앉으며 물었다.

- 혼자 마시고 계시나요.

나는 말없이 입술을 포개 덮고 방어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물었다.

- 뭐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 기분 나빠야만 혼자 술 먹나요.
- 그건 그렇군요.

나는 이 귀찮은 불청객과의 대화를 어서 끝낼 생각이었다. 더 퉁명스럽게 굴기 위해 다음 문장을 머릿속에서 조립해 보았다.

“죄송한데, 그쪽한테 관심 없습니다.” - 그가 묻지도 않았으므로 나만 바보 되기가 십상이다.
“죄송합니다. 바빠요.” - 여기서 혼자 술을 먹는 상황에서 적합한 멘트는 아닐 것이다.
“기분이 안 좋아서, 죄송하지만 혼자 있고 싶습니다.” - 하지만 기분 나쁜 일 없다고 답해 버렸다.

내가 이렇게 혼자 거절법을 고심하느라 침묵 속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손가락을 책상에 톡톡 두드렸다. 가만히 보니 가게에 흘러나오는 음악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 소리가 경계심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나를 건져 올렸다. <KID A>의 수록곡 ‘Idioteque’ 였다. 라디오헤드를 어지간히 들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리듬을 맞추기가 힘들다. 그의 손가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그 손가락으로 내 입을 가리켰다.

- 입 또 벌어졌어요.
- 네?
- 라디오헤드 좋아하시나 봐요.


*

1992년 데뷔, 톰 요크, 조니 그린우드, 콜린 그린우드, 에드 오브리언, 필립 셀웨이. 9장의 정규음반,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락 밴드이자 뮤지션. 나의 젊음은 이 다섯 명의 뮤지션, 하나의 밴드와 늘 호흡해 왔다. 나는 그들과 관련된 모든 음악과 이야기들, 농담들을 사랑했다. 톰 요크 (Thom Yorke)의 톰(Thom)에 들어간 ‘h’는 조니 그린우드(Jonny Greenwood)의 조니(Jonny)에서 빠져나간 것이라는 농담까지도. &#8211; 물론 설명까지 곁들여 가며 풀어야 할 그런 긴 농담을 듣고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
어떻게 그들의 음악에 그토록 빠져들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처음 라디오헤드를 듣게 된 이유는 순전히 리더 톰 요크가 짝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쪽 눈이 감긴 채로 태어났고, 5번의 수술을 통해서 겨우 그것을 벌렸다. 마지막 수술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그는 그의 세계의 왼편을 반쪽의 크기로 보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왼눈을 ‘반만큼 감겨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만큼 뜨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반인들보다 눈이 감겨 있는 것이므로 반쯤 감겨 있다는 말도 온당했고, 수술이 없었다면 그는 평생 눈을 감고 살아야 했을 테니 반쯤 뜨게 된 것도 온당했다. 그리고 사실 어느 편이 맞든지 별 상관도 없었다. 그게 나를 잡아끌었다. 모든 해석을 가능케 하고, 또 그 모든 해석을 옳게 만들어 인간을 썩 무기력하게 만드는 모든 명제들을 나는 사랑했다. 톰 요크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눈마저도 그런 명제를 제공하는 인간이었다.
톰의 왼눈과 나의 돌출된 입을 종종 비교하곤 했다. 실력 좋다는 치과를 돌고 돌면서 교정을 대여섯번 하고 나서야 나의 이빨은 제자리를 찾았지만 따라오는 놀림을 막는 것은 치과에서 해줄 수 없었다. 나는 여자라는 명분으로 모든 부분에서 정갈함을 요구받았다. 그래서 내 입술 사이로 무엇이 새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톰의 왼눈은 구분할 수 없음의 무기력을 웅변했고, 나는 내 입술 사이로 무엇인가 역시 들어오고 있음을 상상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무기력하고 매력 넘쳤다. 무기력한 이들의 입술 사이에는 주로 틈이 있음을 알았다.
2000년에 나온 그들의 4집 음반은 무기력했다. 2000년은 새천년의 시작인지, 아니면 마지막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것만 같은 해였다. 나는 그들의 4집 <KID A>를 듣기 이전까지만 해도 2000년에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가 영 못마땅했으나, 그것을 전곡 재생하고 나서부터는 2000년의 모호함을 모호하게 축하하는 사람들의 멍청스러운 혼란함에서 비롯된 2000년의 무기력함과 외로움이 썩 맘에 들었다. 인생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기를 꼽으라면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해를 꼽으라면 2000년을 늘 꼽았다.
<KID A>에서 그들은 마치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기대와 관심을 어떻게든 피해보겠다는 듯이 자꾸 반항을 했다. ‘Creep’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고자 내놓았던 2집이 또다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톰과 라디오헤드는 3집을 내놓아 전 세계를 무기력의 충격에 빠트렸다. 그리고 그 충격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단숨에 슈퍼 밴드를 넘어선 교과서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KID A>에서 괴성을 질렀다. 노이즈를 잔뜩 덧씌웠다. 아예 작정을 하고 도망을 갔다. 기타도, 드럼도 지우고, 하나하나 다 지워가는 음반이었다. ‘How to disappear completely’ 라는 제목의 곡도 있었다. 웅웅거리는 전자음과 얼음으로 꽁꽁 언 겨울 산에서 공명하는 듯한 읊조림만이 내 고막을 채웠다.
첫 번째로 만난 애인은 술을 좋아했다. 그는 제법 홍대 클럽 이곳저곳에서 불려다니는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나는 장르를 구분할 만큼 음악을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펑크 락 뮤지션이라고 했다. 술을 마시고 공연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매번 섹스를 할 때마다 내 반응을 살폈다. 지금은 어때, 이러면 좋아? 기분 좋지? 나는 그때마다 응, 하고 말 뿐이었다. 그런 질문 하나하나가 너무 고리타분했다. 어느 날 그는 불같이 화를 냈고 그날 밤에 우리는 헤어졌다. 두 번째 애인도, 세 번째 애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늘 그들의 젊은 육체를 확인받고자 했다. 나는 그들의 육체에서 2000년을 돌파하지 못한, 혹은 돌파하기를 거부하는 저항을 느꼈다. 그들은 락 스피릿을 신봉했지만 내 눈에는 멈춰버린 과거의 젊음일 뿐이었다. 젊은 나는 늙은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무기력하게 젊은 인간을 찾아서 헤맸지만, 라디오헤드를 무기력해서 좋아하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세상에 쉬이 드러나질 않으니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었다. 또 어쩌면, 그런 부류들은 나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일 수도.
언젠가 만난 애인은 드디어 라디오헤드를, 특히 3집 <OK Computer>를 나만큼이나 좋아했다. 가까워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에 우리는 내 자취방에서 섹스를 했고 연애를 하기로 했다. 많은 환상이 있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의 등짝을 쓸어내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못내 좋았다.
시간이 지나고 좀더 알게 된 그는 광장을 몹시 좋아했다. 광장으로 나가느라고 그는 늘 시간이 많지 않았다. 종종 무대에서 그는 발언을 했고 피켓을 들고 입을 한껏 벌려 외치는 모습이 학보사의 지면에 실렸다. 데이트를 위해 약속 장소에 찾아가면 그는 늘 일찍 와 있었고 철학 책이나 그런 비스무리한 것들을 읽고 있었다. 그와 나는 홍대에 있는 클럽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보기도 했고 같이 음반샵에 가기도 했다. 그는 기타를 썩 잘 쳐서, 기타로 라디오헤드의 수록곡 중 하나를 연주하면 내가 외웠던 가사를 기억해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내게 그가 라디오헤드를 왜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뜸을 들이다가, 나의 무기력함을 대신 읊조려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너는 라디오헤드를 오독하고 있다고 말했다. 너, 사실 ‘Electioneering’이 노암 촘스키의 저서를 모티브로 쓴 곡이란 사실을 아니? ‘Karma Police’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는 촘스키나 아렌트를 알지 못했다. 모른다고 답하자 그는 두 시간이 넘도록 그것을 내게 설명했다. 라디오헤드는 무기력하고 감성적인 밴드로 보이기가 쉽지만, 실은 아주 심오하게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아티스트라고 말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4집은 좋아해? 그는 당연하지, 하고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렸다. 그러면, 4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그는 4집 <KID A>야말로 환경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인 톰의 웅변가적 기질이 독특하고 효과적으로 녹아든 앨범이라고 말했다.

- Idioteque는 첨단 기술을 비판한 노래야, Idiot과 Technique을 섞어 놓은 단어잖아? 다른 곡들도 마찬가지야. 가사를 들어 봐, 지배하고 규율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비꼬잖아? 아주 현학적이지만.

나는 그렇구나.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나름대로의 강변을 하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열정적이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먼지 덮인 책의 냄새를 느꼈다. 그는 섹스를 하며 나를 늘 애정 어린 손길로 어루만졌지만 나는 그 대화 이후에 그 손길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늙어버린 중년 남성의 손길인 것만 같은 기분, 벌어진 나의 입술과 맞출 그의 틈은 없었다. 우리는 몇 주 뒤에 헤어졌다. 나는 그 두 학자가 유명한 좌파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나는 늙어서 묻힌 학자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2003년에 그와 헤어졌을 때, 라디오헤드는 6집을 발표했고, 조지 부시와 미국에 대한 비판을 잔뜩 담은 곡들을 실었으며, <KID A>는 서서히 평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젊었지만 매년 가을은 점점 빠르게 돌아왔다.

가을이 그 이후로 10번이 더 돌아왔을 때쯤, 나는 노암 촘스키와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게 되었고, 그는 10년 만에 내게 연락이 왔다.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고 연락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를 만나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거니와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어색함을 풀기 위해 소주를 진탕 퍼마셨다. 그는 수염이 몹시 덥수룩했고 나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우리는 술김에 방을 잡고 잤다.

이틀 후 나는 그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조의금 봉투에 그가 모텔 식탁에 올려두고 간 5만원을 넣었다. 애초에 나의 것이 아닌 것밖에는 줄 것이 없었다.

*

‘Idioteque’가 끝나갈 무렵까지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맥주 한 잔씩을 시켰다. 내가 운을 뗐다.

- 그렇지 않아도 여기 그래서 자주 와요.
- 라디오헤드 틀어줘서요?
- 네. 술집에서 술맛 떨어지게 라디오헤드 틀어주는 데가 요즘 어디 있어요. 댄스곡, 발라드곡, 팝송 틀지.
- 그렇죠.
- 전 밥만 엄마가 주고 라디오헤드가 키웠다고 해도 될 거에요.
- 저도 그래요. <Kid A>가 나왔을 때 갓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때 고등학교에서 음악 한다는 선배들은 전부 라디오헤드를 듣고 다녔죠.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요즘 말하는 힙스터의 표본이었달까.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 우린 항상 그들 얘기만 하고 다녔었죠.
- 저는 <Kid A>가 나왔을 때, 어디 보자, 대학교 3학년이었네요.
- 그럼 저보다 다섯 살 많으시네요. 98학번?
- 네. 그쪽은 03학번. 맞죠?
- 라디오헤드 키드네요.
- 네?
- 라디오헤드 키드요. ‘키드’일 때부터 라디오헤드 듣고 자랐으니까.
- 이제 ‘키드’는 아닌 걸요.
- 뭐, 그렇죠. 그래도 그런 ‘키드’의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라디오헤디즘, 그런 말 들어보셨겠죠.
- 그럼요.
- 말하자면, 그 라디오헤디즘에 경도된 사람들을 쉽게 부르는 방법이죠. 라디오헤드 키드. 키드였을 때, 혹은 자신이 아직 키드라고 생각했을 때 라디오헤드에 빠졌던 사람들.
- 재밌네요. 마침 <KID A>라는 앨범도 있고.
- 그러게요.
- 재밌지 않아요? 라디오헤드를 가지고 나이를 밝히고 알아맞히는 게.
- 그러게. 그럼 그쪽도 이제 대학 얘기는 가물가물하겠네요.
- 그렇죠. <KID A>가 언제 적 얘기야. 벌써 17년 전이네.”
- 더 재밌는 게 뭔 줄 알아요?
- 뭔데요?
- 이제 내년쯤이면 라디오헤드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순번이에요.
- 명예의 전당?
- 로큰롤 명예의 전당. 아세요?
- 네. 알죠. 별 의미는 두지 않지만.
- 그래요. 뭐 별건 아니죠. 어느 바닥이든, 올드한 것들에 전설 딱지 붙이면 다시 팔아먹기가 좋으니까. 향수를 가진 인간들에게 그만한 상품도 없죠.
- 근데 왜 라디오헤드가 벌써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나요.
- 라디오헤드 데뷔한 지 올해가 25주년이에요. 92년 데뷔. 올해가 2017년.
- 네?
- 그래요. 그렇더라고.

*

10년 만에 만났을 때, 우리는 술을 잔뜩 마셨고 곧 몇 시간 만에 서로 나체였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그는 침대에서 머리를 긁으며 숙취로 신음했고 나는 옷을 간단히 입고 모텔의 대실을 하루 더 연장하고 근처 한식집에서 김치찌개 두 개를 배달 주문했다. 씻고 나와서 화장대 앞에 앉은 나에게 겨우 정신이 든 그가 말을 걸었다.

- 남편한테는 어떻게 둘러대려고.
- 남편 없어.
- 결혼 안 했어?
- 했었지.
- 그렇구나.
- 너는.
- 안 했어.
- 했었던 거야?
- 아니, 한 번도.
- 왜, 아직도.
- 무서워서.
- 뭐가.

그는 마시다 남은 맥주 캔들을 뒤적거리다 조금 남은 캔을 입에 털어 넣었다.

- 이건 오래된 이야기인데 말이지. 나는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정말 젊었을 때의 이야기야. 그러니까, 너랑 연애하기 이전, 스물 초반 남짓했을 때, 난 소리가 지르고 싶었어. 세상을 뒤집고 싶었지. 늘 섹스 피스톨즈를 떠올렸어. 여왕의 나라에서 아나키즘을 외치는 쟈니 로튼이 정말 위대해 보였어.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난 굉장히 못마땅했어. 세상을 뒤집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때쯤 <OK Computer>의 가사를 주워 들어봤지. 내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세상을 뒤집어 엎기 위한 새로운 지렛대는 섹스 피스톨즈가 아니라 라디오헤드구나. 나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털고 흔들면서 펄쩍펄쩍 뛰어댔지.... 아. 생각해보면 그때쯤인 것도 같군. 그때쯤에 네가 나와 헤어졌고 내가 담배를 배웠지.
왜 헤어졌을까. 나는 십 년 넘도록 그게 궁금했어. 넌 <KID A>를 좋아했지. 그걸 어느 날 다시 꺼내서 듣는데, 꼭 이렇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 '세상이란 것은 뒤집을 수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실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라고'.
그때부터였나 봐, 나의 쟈니 로튼이, 그렇게나 외로워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 섹스 피스톨즈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006년에 수훈되었다지. 알고 있어? 섹스 피스톨즈의 쟈니 로튼은 수상받기를 거부했어. 사람들은 정말 그들답다며 찬사를 보냈지만 나는 눈물이 나더군. 로튼은 상을 거부하며 조금이나마 외롭지 않았을까, 빈 시상식 무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어. 아마 이런 생각을 로튼이 알았다면 쌍욕을 퍼부어 주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로튼이 처량해 보였을 때, 난 이미 늙어 버리고 또 한편으로 젊어진 셈이야.
무엇이 두렵느냐고 물었지. 가장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 줄 알아? 너와의 이별에서 온 생채기? 그건 단지 10년 전의 작은 사건일 뿐이지. 문제는 그 이별 이후, <KID A>를 다시 듣게 되었을 때, 톰 요크와 라디오헤드가, 마치 쟈니 로튼처럼 안쓰럽고 헛되어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야. 락은 명백히 멸망해 가고 있고, 그들은 데뷔한지 20여 년이 지나서 이제 전설의 반열에, 아니 좋게 말해 전설이지,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갈 준비를 하고 있어. 젊음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젊음이 되었던 그들이, 파괴당하지도 않고, 공격받지도 않은 채 오로지 무관심으로 사위어갈 것이 납득이 되니?
라디오헤드 다음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다음이라면 난 또 늙겠지만, 결코 한편으로라도 젊어질 수는 없겠지.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낸 그림자 밑에서 사는 것을 이제 겨우 받아들였는데, 사실 세상이란 것은 공중에서 폭발해 버린 지 오래고,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파편을 주워들고 수음하는 꼴이란 것을 어떻게 하면 납득할 수 있을까.

나는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는 내 눈빛 안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찾아 헤맸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실패한 모양이었다.

- 그래서 나는 나중에, 라디오헤드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지 않기를 바래, 간절히.

내가 되물었다.
- 명예의 전당이 뭔데.
- 데뷔한지 25년이 넘은 뮤지션들 중에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거야.
- 오르지 않을까. 라디오헤드 정도면.
- 그래. 그들은 너무나 위대해서 오르고 말겠지. 위대한 것이 위대해서 위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이해할 수 있니?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잠시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그는 김치찌개 배달이 오기도 전에 조용히 방을 나갔다. 탁자 위에 5만원이 놓여 있었다.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무슨 밥값을 5만원씩이나 두고 가. 계좌번호 불러.’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틀 후에 그의 부고를 들었다. 나는 다행히도 그의 5만원을 챙겨 두고 있었다. 조의금에 그것이 쓰였다.

*

- 벌써 데뷔한 지 25년이라구요, 정말 그렇게 됐단 말예요?
- 그렇죠. 이제 톰도 늙었잖아요.
- 난 명예의 전당은 다 늙어빠진 아티스트들이나 올라가는 곳인 줄 알았어요. 더 이상 음악적 생기는 없고... 이제 전설의 칭호를 기분 좋게 들으면서 죽어갈 일만 남은 사람들 말이에요.
- 에이. 뭐 꼭 그렇지는 않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게 꼭 은퇴했단 얘기는 아니니까. 오른 뒤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 그래봐야 어쨌든 평생 회자될 작품들은 전부 젊었을 때 내는 것 아녜요.
- 그렇죠. 그건 틀림없이.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무엇을 참아내는 것과 같이. 맥주를 꼭꼭 씹어서 삼켰다. 그는 시종일관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내 입가에 팔자 주름이 패였다.

- 그러면 이제 라디오헤드도 오래된 젊음이네요.
- 오래된 젊음이요?
- 이제 우린 너무 젊은지 오래 되었잖아요.

그는 픽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바람이 새는 듯했다. 그는 만지작거리던 손을 그만두고 입술을 벌려 허옇게 뜬 입술의 각질을 뜯었다. 깊게 뜯은 자리에서 피가 여린 입술 살 위로 배어나왔다. 나는 그에게 냅킨을 건넸다. 그는 가볍게 목례하고 냅킨으로 피를 닦아냈다. 갈색 냅킨 위에다 뱉은 피는 묽고 흐렸다. 그는 남은 맥주로 피를 씻어 삼켰다.

생각해 보면 그들의 음악을 파고들었던 것은 내가 젊다는 것을 입증받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의 톰과 조니는 늘 젊었고, 그들의 음악은 새로운 젊음의 표상이었다. 마약과 섹스로 점철된 60년대의 히피식 젊음, 때려 엎고 부수자는 아나키즘 펑크의 오래된 젊음, 깃발과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치는 피끓는 젊음, 그런 것들은 내게는 너무 먼 세계였다 &#8211; 뒤집어엎을 힘도 없고, 마약이나 섹스를 할 용기도 없는 내게는 말이다.
이제 와 생각하니, 벌어진 입술을 인식하고도 닫지 않는 것은 나의 소심하지만 오래된 나름의 반항이었다. 형상기억합금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무어라 할 요량이면, 왜 애초에 다른 모양으로 구부렸느냐고 따져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난 원래 이런 모양일 뿐인데. 그렇지만 그런 반항이 오래 가지는 못했고, 나는 수없는 고통을 참아내며 이빨을 네 개 뽑고 교정을 했다. 그래도 입술을 벌린 채로 두면, 그 벌려진 틈 사이로 나를 꽉 조이던 나사들이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입술 사이로 내 영혼이 빠져나가서 방 안을 휘도는 것 마냥 난 한껏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또 무기력해지곤 했다. 나를 조이던 그 모든 나사들은 나를 쓸 만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들이었다. 결국 쓸모없는 인간이어야만 자유로워지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러니 조심스럽게 해야만 했다. 무기력이라는 견고하고 따스한 이불 안에, 내가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의 연약한 저항을 녹여서 감춰둘 때 나는 비로소 구원받았다.
라디오헤드는 내 입을 하릴없이 벌렸다. 그들의 음악을 듣기만 하면 나는 굳이 공상에 잠기지 않더라도 입술을 벌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음악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것이 내가 젊음과 무기력함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 두 개념은 라디오헤드라는 다리로 서글프게 연결되어 있다. 누구든, 젊음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라디오헤드로 나와 연결될 수가 있었다. 지금 내 앞의 이 남자처럼.

- 실은 저도 라디오헤드 때문에 이 술집에 자주 와요.
그가 가만히 읊조렸다. 통통거리던 그의 미세한 경박함은 간데없었다.
-여기 와서, 그쪽처럼 가만히 음악 들으면서 술 먹는 사람들을 찾죠. 낯선 사람들. 이렇게라도 가끔 라디오헤드 키드를 찾아다니는 게 삶의 낙이랄까요.

그는 잠시 손으로 코를 비비적거리더니, 한번 눈살을 찌푸리고 책상을 두 번 톡톡 두드리며 일어섰다.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 저, 잠깐만요.
- 네?
- 오래된 젊음이라고 했잖아요.
- 네.
- 그러면 오래되지 않은 젊음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다만...
- 다만?
- 낡을 순 있어도 늙은 젊음은 없지 않을까요. 오래된 건 낡은 거지 늙은 게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여기서 만났잖아요.
- 그래서 여기에 와서 사람들한테 말 거는 거예요? 낡은 걸 고치고 싶어서. 먼지 털어내려고.
- 에이. 이건 털어지지도 않아. 시간 지난 음악은 잊혀요. 그게 당연한 거야. 라디오헤드도 이제 수많은 락 밴드들이 따라하는 스타일이잖아요. 게다가... 더 따지고 보면 사실, 요새 누가 락을 해요. 락이란 것도 다 옛날 얘기 됐어. 그냥 낡은 음악 들으러 오는 거죠.
-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그래요. 그래도 같이 들을 사람 있으면 또 좋잖아?
- 그렇죠.
- 종종 와요. 그땐 제가 말은 안 걸겠지만.
- 이제부터 아는 사이로 알아 가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라디오헤드 키즈. 그런 걸 만들면 되는 거죠.

하하.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일어서 문 쪽으로 홀연히 걸어 나갔다. 그가 떠난 탁자에 5만원이 놓여 있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