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희 강사
고고미술사학과

하루가 유난히 길고 힘든 날 저녁, 아이를 재우기 위해 책을 읽어주던 참이었다. “하준아, 너는 왜 사니?” 엄마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이는 눈을 몇 번 껌벅이며 나를 빤히 바라본다. 다섯 살 남자아이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고 생각하던 참에 아이가 대답을 한다. “어, 어, 세상이 멋지잖아.” 몇 번 뜸을 들이고 아이의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적잖이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질문을 이어갔다. “뭐가 멋져?” 아들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려니 생각하고 확인 차 던진 질문이었다. “나무도 멋지고, 열매도 멋지고, 꽃도 멋지고….”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매일 오전 두 시간 넘게 야외놀이를 나간다. 이 시간에 아이는 근처 산도 올라가고 공원 잔디밭 위를 마음껏 달리기도 하고 나무 위를 기어오르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의 주머니와 가방엔 언제나 예외 없이 작은 돌멩이나 솔방울, 갖가지 열매와 나뭇잎이 한가득이다. 이 아이가 매일 마주하는 세상은 멋진 것 투성이다.

세상이 멋져서 살맛 난다는 아이의 대답이 놀라웠던 이유는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세상이 멋졌던 순간은 너무나 아득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내일이 빨리 오길 기다리며 잠을 설쳤던 순간이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꽤 오랜 시간 내게 세상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미국에 박사학위 유학을 떠난 해에 터진 911 사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몇 년 후 일어난 세월호 사건,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 테러, 학살, 성폭력, 아동학대를 접할 때마다 세상은 정말 불공정하고 구제 불능이고 살 곳이 못 된다며 욕을 퍼부었다. 마주하기엔 너무나 끔찍해서 외면하고 싶은 것, 도망치고 숨어버리고 싶은 것, 슬프게도 그게 나의 세상이다.

아들의 대답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이 놀라움이었다면 두 번째는 부러움이었다. 아이에게 말은 안 했지만 “넌 좋겠다. 매일 그렇게 멋진 세상에서 살아서 참 좋겠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속삭였다. 나도 아이의 멋진 세상으로 풍덩 빠져 들어가 해맑게 깔깔거리고 싶다. 끔찍하고 슬픈 세상에서 멍이 시퍼렇게 든 가슴을 쓸며 한숨으로 남은 시간을 채우고 싶지 않다.

아들과의 대화 중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가 떠올랐다. 19세기 사실주의 미술에 이어 등장한 인상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감 없이 그린 사실주의와 달리, 화가의 시각적인 감각과 인상을 캔버스 위에 펼쳐 그렸다. 이를 위해 모네는 제자들에게 실제 사물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오직 색채에만 집중하라고 가르쳤다. 실제 사물에 대한 전제된 지식 없이 순수한 색채와 빛의 인상만을 그리고 싶었던 화가 모네는 심지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 화가가 되고 난 후에 시각을 얻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모네는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이 세상의 순수한 색채와 빛을 자신의 캔버스 위에서 실현했을까?

하루가 유난히 길고 힘든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아이의 자전거가 눈에 들어온다. 항상 무심코 지나쳤던 아이의 자전거 앞 바구니에 무언가가 들어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그 바구니엔 솔방울 하나, 도토리와 작은 돌멩이 몇 알, 모과 두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이가 하루 종일 뛰어놀며 만난 세상, 녀석에겐 너무나 멋진 세상, 나도 한 번쯤은 만나고 싶은 그 멋진 세상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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