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1975년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공쿠르 상’(Prix Goncourt)을 받으며 문학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에밀 아자르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그로부터 18년 전에 다른 작품으로 같은 상을 받아 이미 인기 대열에 올랐던 로맹 가리의 또 다른 필명이었다. 말하자면 로맹 가리는 한 번 수상한 이에게 다시 수여되지 않는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를 일생에 두 번이나 거머쥔 것이다. 기성작가로서 당시에는 ‘지는 별’ 취급을 받던 자신의 작품을 더 진지하게 탐독하지 않는 문학 비평계를 보란 듯이 뒤흔든 일이었다.

로맹 가리가 다른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했던 것은 평단에 대한 오기였을까 자신의 건재함을 확인받기 위함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는 에밀 아자르가 수상자로 낙점되었을 때 가면을 벗고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로맹 가리는 조카인 폴에게 에밀 아자르가 되어달라 부탁했고, 수상 거절 편지를 공쿠르상 아카데미에 보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심사위원에게 온 답변이 다음과 같았기에 에밀 아자르는 결국 수상을 받아들인다. “아카데미는 한 후보가 아니라 한 권의 책에 투표한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 그렇듯, 공쿠르상은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다.”

떠오르는 신성 에밀 아자르가 평론계에서 저물어가던 문인 로맹 가리라는 사실은, 그가 권총을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겨 생을 마감한 후에나 유서를 통해 밝혀졌다. 7권의 로맹 가리의 작품과 4권의 에밀 아자르의 작품이 번갈아 6년에 걸쳐 나오는 동안 평론계에서는 작품들 곳곳에 비친 같은 작가의 목소리와 비유, 인물의 관계를 읽어내지 못했다. 로맹 가리에게 표절당한 에밀 아자르를 생각했을 뿐, 에밀 아자르를 만들어낸 로맹 가리를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에밀 아자르의 가면을 대신 쓴 조카 폴이 로맹 가리와 친척 사이라는 것이 알려져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평론계 밖에 있던 대중 잡지 「파리 마치」의 한 여성 기자만이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다’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고 로맹 가리는 훗날 유서에서 밝혔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Vie et Mort d’Emile Ajar)』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유서에서 로맹 가리는 두 개의 삶을 살았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작가는 그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아무도 신경 쓸 일이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받아 마땅한 몫을 돌려받는다.” 사람들이 삼십여 년간 만들어준 얼굴, ‘어떤 작가’라고 그의 생(生)과 작품을 규정짓는 시각에서 그는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 같다. 모스크바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인이었던 로맹 가리에게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이미 삶의 시작부터 주어져 있었으리라.

한때 문단의 스타로서 화려하게 받았던 조명, 권위, 명성은 왕관이 되었지만 그 무게에만 갇혀있거나 그것에 기댄 채, 그것을 휘두르는 삶을 살기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늙은 문인 로맹 가리는 점점 더 살아있는 모험을 좇았기에 하나의 삶이지만 두 개의 생을 살았다. 말년으로 갈수록 불행한 결혼생활과 외로움 끝에 스스로 생을 끝냈지만, 긴 유서 마지막 줄에서 밝혔듯이 그는 마지막까지도 생을 무척 즐겼으리라 짐작된다. 부모에게 버려진 비참한 자신의 생(生) 속에서조차도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돌보는 생(生)을 발견했던 소년,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와 같이.

김빈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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