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문화계 '미투'(#MeToo) 운동

지난달 내내 SNS에 쏟아져 나오는 증언을 통해 고스란히 밝혀진 유명 인사들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그동안 가해자의 성범죄 사실에 대한 폭로를 망설이던 사람들이 용기내 ‘미투’(#MeToo)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성범죄가 문화권력에 의한 것임이 점차 밝혀짐에 따라 그동안 침묵을 강요해온 문화계 구조를 개선하고 내부 구성원들의 성 관념이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해시태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고은 시인이 상습적으로 성범죄를 가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촉발된 문화계 미투 운동이 한 달째 이어져 오고 있다. 미투 운동이란 SNS상에 해시태그 ‘#MeToo’를 단 채로 성범죄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 경험을 공유하고 사회에 만연한 성범죄를 비판하며 퍼진 운동이다. 전 문화·예술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을 통해 고은 시인, 이명행 배우, 이윤택 연출가, 조민기 배우, 오달수 배우, 박재동 만화가 등의 성폭력이 세상에 알려졌다. 피해자들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가해자들의 성범죄 사실을 밝히며 상습적으로 행해지던 성범죄 사실을 방치해왔던 가해자와 문화예술계를 비판했다. 이후 논란이 커지자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들은 활동을 중단하거나 대중 앞에 고개 숙여 사과하기도 했다.

미투 고발자들은 성범죄 피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형사 고소 대신 미투 운동을 택했다. 이에 대해 서울지방변호사회 이선경 인권위원은 “문화계 조직 안에서 제대로 된 징계가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고, 형사 고소를 하더라도 가해자들을 처벌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성폭력 가해자가 집단에서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을 경우 집단에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은 더욱 하락한다. 이선경 인권위원은 “고은 시인의 성추행 전력은 오래전부터 문단 내에 널리 알려진 사실임에도 ‘작가회의’는 고은 시인을 상임고문의 지위에 올리기까지 했다”며 피해자들이 소속된 조직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외에도 성폭력의 공소시효가 지나 법적 수사가 불가능한 경우 피해자들은 미투 운동으로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기도 한다. 양현아 교수(법학과)는 “현행법상 성폭력 사건에 대해선 공소시효가 존재하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거나 미투 지목자들의 형사처벌이 목적이 아닌 경우 미투 운동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문화계의 미투 운동은 조직 내부의 제도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지 못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장이 됐다.

비뚤어진 문화권력을 먹고 자란 권력형 성범죄

문화예술계는 그간 내부의 성범죄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해왔다. 전문가들은 문화계 내의 왜곡된 성 관념이 이같은 태도를 부추겼다고 입을 모은다. ‘여성문화예술연합’ 이성미 대표는 “오랫동안 문화계는 여성을 자유로운 연애의 대상이나 뮤즈로 여겨왔다”며 “이런 분위기가 잘못된 성 관념으로 이어져 성범죄의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며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계에선 이런 왜곡된 성 관념을 바로잡아 줄 체계적인 성교육이 없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7일 공개한 ‘예술계 구조적인 성폭력 실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60.3%의 응답자가 ‘성폭력 예방교육 경험이 없다’고 답했고 경험자 중 51.2%가 교육 내용이 예술계에 적합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이런 왜곡된 성관념에 기형적인 구조가 더해져 문화계는 성범죄라는 폐단을 쌓아갔다. 물론 성범죄가 문화예술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문화예술계는 ‘제왕적 지위’를 가진 한 사람 아래 다른 구성원들이 종속되는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성범죄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현재 공연계 내 문화 권력은 이윤택과 같이 경력이 오래된 연출가에게 집중돼있다. 이와 관련해 ‘성폭력반대예술인행동’ 측은 “소위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연출이나 예술 감독 1인 체제의 극단에선 처음 만난 관계가 10년, 20년 이상 지속되므로 위계는 더욱 공고해진다”고 설명했다. 문단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성미 대표는 “한 인물이 등단할 신인을 뽑는 심사위원, 문예지의 기획위원, 문예창작과의 교수, 문학상 심사위원 등을 겸임하는 것이 빈번하다”며 여러 지위를 겸임해 막강한 권력을 갖는 인물들의 성범죄 사실은 쉽게 폭로하지 못하는 문단의 현실을 비판했다. 결국 일부 권위자에 의해 금전적 수입에 족쇄가 채워진 문화계 종사자들은 범죄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도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5 예술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문화예술인 3명 중 2명은 월평균 수입이 1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이성미 대표는 “이런 상황 속에 일감이나 경제적 후원을 제시하며 성관계를 강요하는 대가성 요구가 공공연하다”고 덧붙였다.

법에 가로막힌 그들의 간절한 외침

미투 운동을 통해 문화계의 이면이 가감 없이 드러나자 이에 대한 체계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단적인 예로 이윤택 연출가의 상습적인 성추행 및 성폭행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국민청원에 19만 명 이상(3월 3일 기준)이 참여했다. 이처럼 여론이 들끓자 지난 23일 ‘국정현안조정점검회의’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저항하기 어려운 약자에게 권력을 악용해 폭력을 자행하는 경우는 가중처벌 해야 옳다’며 ‘혹시 법의 미비가 있다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가중처벌을 할 수 있도록 준비했으면 한다’고 현 사태에 대한 개선 의지를 밝혔다. 이어 26일 문재인 대통령 역시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여해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국내 형법의 테두리 안에선 가해자들의 처벌이 여론이 요구하고 있는 수준에 못 미칠 가능성이 크다.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성범죄는 대부분 2000년대 초반 이전의 사건이기 때문에 공소시효를 지나 원칙적으론 법적 처벌이 불가능하단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양현아 교수는 “국내 형법은 보수적인 시각에서 개인 간에 일어난 사건을 바라본다”며 “공소시효의 폐지나 가해자들의 가중처벌이 논의된다 하더라도 법이 개정되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리고 개정 이후에도 개정 이전의 사건에까지 개정안을 적용하는 소급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되려 미투 고발자가 처벌받을 가능성도 있다. 이선경 인권위원은 “현행법상 피해자들이 성범죄를 폭로한 경우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 훼손으로 피의자에게 고소를 당할 수 있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한다 해도 가해자로부터 무고죄로 역고소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미투’ 바람 타고 퍼진 자정 노력

따라서 문화계 내부의 성범죄를 근절하려면 개인 간에 일어난 사건 위주의 형법 차원을 넘어 공동체 차원의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양현아 교수는 “이런 사건이 사회가 개인에게 가한 폭력임을 인지한다면 가해자가 속한 공동체에서 공동체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체부는 이달 중 미투 운동에 대응할 ‘특별신고상담센터’를 신설해 100일간 운영하고, ‘예술인복지재단’ 내 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해 법률자문과 심리 상담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성미 대표는 예술인복지재단에 가입하기 위해선 ‘예술 활동 증명’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예술 활동 증명을 받지 않거나 자격이 되지 않는 예비예술가는 기성 예술가의 성범죄를 신고할 창구가 없다”고 해당 정책의 적용 범위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한국연극연출가협회’는 회원의 가입조건과 관리를 철저히 해 연출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겠다며 모든 회원에게 ‘공연 제작 중 발생하는 성폭력 및 권력남용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전 예방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서약서를 매 사업마다 받도록 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이번 미투 운동을 계기로 결성된 성폭력반대예술인행동은 보다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은 “제작사는 배우의 연기력, 티켓 파워뿐만 아니라 그가 위계폭력이나 성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은 아닌지 고려해 캐스팅해야 한다”며 “분명한 가해사실이 드러난 가해자와의 작업은 보이콧하겠다”고 성폭력 가해자를 문화계에서 격리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사회 전반의 성범죄는 개인의 도덕성만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 확인됐다. 특히 문화예술계는 왜곡된 성 관념, 불균형한 권력 구조, 구성원들이 겪는 금전적인 어려움마저 더해져 내부의 성범죄를 쉽게 폭로하지 못해왔다. 문화계의 곪은 상처가 드러나자 정부와 업계는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나섰고 구성원들의 인식 또한 점차 변화하고 있다. 이번 운동을 계기로 그간의 잘못된 행태를 인정하고 발 빠르게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해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삽화: 손지윤 기자 unoni0310@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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