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지 편집장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망각의 영역으로 미뤄 당장의 책임을 회피하게 해주는, 퍽 간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확언할 시 감수해야 했을 위험을 모호함으로 흐려주기 때문에 말하는 상황이 기록되고 있다면 더더욱 편리하다. 그래선지 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대포처럼 장전된 공개 법정에서나, 마스크를 끼고 기자 무리를 헤쳐 나가는 휠체어의 뒤꽁무늬에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단골로 등장한다.

클리셰가 클리셰인 데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지만, 예상치 못했던 이들이 이 해묵은 클리셰를 본인의 카드로 속속들이 끌어다 쓸 줄은 몰랐다. 특히나 2년 전인 2016년, 취재에 열을 올리며 공연을 제법 보러 다녔던 문화부 기자 시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최근 기사에 익숙한 이름들이 제법 보여 흠칫 놀라곤 한다. 광장에서 용감하게 촛불을 치켜들었던 손을 그대로 안쪽으로 끌어와 본인들을 비춰보고 반성한 이들도 있는가 하면, 촛불은 바깥에서만 휘두르고 정작 본인들이 쌓아 올린 견고한 권력 구조는 편한 대로 망각해버린 이들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더러 있어선지, 고통스러운 발화 행위를 통해 재구성된 끔찍한 기억들을 정치적인 연극으로 치부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익명으로 글을 작성했다가 지웠으니 전혀 믿을 수가 없다. 지목당한 사람을 매도하지 말라.’ 이해 불가한 주장은 아니다. 요지경인 세상에 거짓을 고하며 ‘해당 운동의 본질을 흐리려는’ 이상한 사람이 전혀 없으리라고 확언하기 어렵고, 공소시효를 넘길 만큼 수년이 지난 후 발화된 한 사람의 기억은 혹자가 주장하듯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상황을 실제 본인들이 정치적 승기를 잡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려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상처의 기억을 꺼내 가면서까지 발화한 이들의 목소리를 모조리 정치적인 ‘음모’로 몰아가는 발언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미디어에 의해 포르노그래피 적으로 소비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스스로 신상을 밝히고 기억을 발화하는 이들이 늘고 있으며, 기억의 기록들까지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의 단발적 기억은 그 자체가 객관적인 증거로 성립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모인 조각들로 촘촘히 재구성된 기억은 그 자체로 시간축과 공간축을 차지하는 사건이 된다.

다행히, ‘정치질하는 것이 아니냐’는 모욕적인 질문에 힘을 모아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을 모아 정치(바로 세워 사회를 바꿈)를 하겠다’는 현답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2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국민청원에 참여한 것은 물론이고, 실질적으로 법적 처벌을 강구하고 도움을 주는 연대체가 꾸려졌으며, 관객들이 나서서 보이콧 의사를 밝히기도 했고 자체적으로 정화를 거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힌 단체들도 있다. 용기 내 상처의 기억들을 꺼낸 이들로부터 시작된 논의(‘#MeToo’)는, 이제 그렇게 모인 기억의 구슬을 꿰고 연대해 공명하겠다(‘#WithYou’)는 이들과 만나 발걸음을 나란히 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가 도미니크 라카프라는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성찰로 공감을 제시한다. 그는 트라우마 자체가 결코 대상화돼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트라우마에 대한 공감을 통해 과거를 진정성 있게 바라보고 지속해서 해석할 수 있게 열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클리셰가 클리셰인 데엔 이유가 있다. 결국은 관심과 연대다. 상처의 기억에서 비롯된 운동이 지속해서 온전한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인다면, 기억의 ‘정치질’로 몰아가려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기억의 ‘정치학’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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