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우 부편집장

1년 전 이야기다. 2017년 3월 12일 저녁, 「서울대저널」(저널)은 본부점거본부가 협력부처장실에서 발견한 메모를 폭로한다. 불과 몇 시간 전 『대학신문』이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백지발행 사실을 알린 상황에서였다. 저널에 따르면 메모는 2016년 9월 13일 본부 확대간부회의에서 작성됐으며 『대학신문』이 3주 연속 1면(『대학신문』 1927~1929호)을 모두 할애해 시흥캠퍼스 이슈를 학생 입장에서 편향되게 다뤘다고 말했다. 저널은 『대학신문』은 아젠다가 시흥캠퍼스 밖에 없냐는 지적과 주간 교수의 통제 능력이 없다는 내용도 적혀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저널의 기사를 읽으며 남은 것은 허망함뿐이었다. 단순히 편집권 분쟁으로 보였던 갈등 뒤엔 『대학신문』에 대한 학교의 조직적인 통제와 탄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대학의 공기(公器)로 출발한 『대학신문』의 소재를 기자단이 없는 회의에서 이야기한다는 것, 주간에게 통제를 요한다는 것이 언론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음을 본부가 몰랐을 리는 없다.

2016년 10월 『대학신문』 운영위원들에게 항의서한을 발송했을 때부터 백지발행까지, 『대학신문』은 시나브로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많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광고 재계약이 되지 않아 대부분의 광고란을 자체 제작 광고로 채워 발행했고 신문사 행정 업무를 맡는 업무국은 공석이 됐다. 세 명으로 구성돼야 하는 간사실엔 한 명의 간사만이 남아있었으며 자문위원 교수들은 사임을 했다. 백지발행 전주에 발행된 1939호 제작과정에 참여한 사람은 학생 기자들과 당시 부주간, 행정 업무를 임시로 맡은 간사 한 명 뿐이었다. 2017학년도 예산 지급도 불투명한, 텅 빈 신문사에서 우리는 신문을 만들었다.

우리가 그동안 만들던 신문은 무엇이었을까. 학교가 기대했던 어용신문이나 홍보지 따위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조영복 문학평론가(1985~1986년 학생기자)의 말처럼 ‘우리의 실존은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으리라. 저널의 기사는 우리가 잘못된 탑을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건대, 백지발행은 표면적인 편집권 분쟁을 넘어 학내 언론에 대한 학교의 기형적 인식 위에 세워진 『대학신문』이란 탑을 쓰러트리는 과정이었다. 학교가 공들여 쌓고자 했던 탑 말이다.

그리고 지난 일 년은 무너진 탑을 다시 쌓는 시간이 됐다. 새로 부임한 주간단, 자문위원, 간사, 업무국과 기자단이 협의를 계속했고 3주 후 다시 신문을 만들기 시작했다.(2017년 4월 3일자) 2학기엔 『대학신문』 구성원 대표와 교수, 외부 위원들로 이뤄진 ‘대학신문제도개선위원회’를 네 차례 열었다. 백지발행 사태에 대해 논의했고 인권센터에 제소된 전임기자 7인에 대한 논의도 이어갔다. 기자단 내부적으로는 사칙 개정을 위한 회의가 수차례 열렸다. 백지발행과 같은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함이었다. 크게 기자의 역할을 사칙에 추가해 권리를 명시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고, 신문사의 여러 주체들의 대한 역할도 재검토했다. 현재는 사칙 개정안을 상반기에 있을 『대학신문』 운영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올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어느새 백지발행으로부터 1년이 흘렀다. 일련의 사건들이, 그리고 일 년의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공든 탑도 무너진다는 것, 잘못 쌓아진 탑은 무너트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탑을 새로 쌓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대학신문』이 무너짐으로써 단단해졌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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