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시절에 기숙학원을 1년간 다녔었다. 명문고 학생이었던 나는 재수 시작 후 패배자에 불과했다. 내가 먼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쓰러져가는 자존심을 붙잡고 있던 나는 주변 환경에 무너졌다. 몇몇 강사들은 여학생들에게 끊임없는 성차별 발언을 했으며 우리를 ‘부모 등골 빼먹는 족속들’로 규정했다. 손찌검도 빈번했다. 처음에 이상하게 느끼던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상황에 익숙해졌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재수생이기 때문에 1년만 버티면 되는 그곳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런 폭력들을 학업 분위기 조성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선생이라는 완장을 차고 반 안에서 자신만의 국가를 경영 중일 것이다.

학생은 끊임없이 미래를 기약하며 현재를 납득하는 존재다. 대학원생도 마찬가지다. 대학원 내에서 버티는 몇 년이 자기의 인생 계획에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많은 대학원생은 권력 아래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적응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사람들은 상황보다도 자신을 바꾸는 일을 더 잘한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은 계속 참아왔다. 수많은 대학(원) 내 인권유린, 노동력 착취는 수면으로 드러났으나 그때마다 가스 불 꺼지듯 잠잠해졌다.

어린 시절에 봤던 만화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개구리 세 마리를 끓는 우유 안에 넣는 실험이 한창이었다. 한 개구리는 몸이 뜨뜻해지는 데 정신이 팔려서 죽었고, 다른 개구리는 처음에 미친 듯이 날뛰다 힘이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개구리는 어땠을까? 마지막 개구리도 처음엔 당황하고 뒷다리를 휘적거렸다. 그런데 그의 발치에 점점 둥그런 것이 생기더니 굳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우유가 휘저을수록 응고되는 것을 알고 열심히 발을 굴러 자기 키만 한 치즈를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엔 탈출에 성공했다.

대학원노조는 탄생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생조직이지만 그 탄생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끓는 우유가 넘쳐흐르기 전에 개구리가 뒷발을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많은 대학원생이 권력 관계 아래 희생돼왔지만, 그 일들이 모두 의미 없었다고 치부할 순 없다. 그들이 뭉친 작은 치즈 덩어리들이 이제 밑거름이 된 것이다.

대학원노조 위원장에게 어려운 점은 없냐고 묻자 그는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각국의 대학원생들, 국회의원, 심지어 몇몇 교수님까지 우리를 응원해주신다. 그래서 이제 시작이지만 노조가 제 목소리를 잘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확신했다. 부당한 권력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열심히 그 상황에 적응해서 적당한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고, 악을 쓰다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살아나가기 위해선 자신의 환경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 부당함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 부당함 속에서 진정 행복할 수 있는지. 또 그 부당함이 약속하는 보장된 미래가 정당한 것인지.

나는 결국 재수에 성공했고, 목표한 대학에 왔지만, 그때 기억들은 가끔 재생되곤 한다. 잘못된 발언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청중이 되거나, ‘교대나 가야 하는 여자애’가 되거나, ‘대학 못 간 패배자’가 되는 내가 자꾸 떠오른다. 부당함을 묵과한 것의 대가는 생각보다 치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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