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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며느라기'의 결말을 찾아서웹툰 '며느라기' 리뷰
  • 대학신문
  • 승인 2018.03.18 04:03
  • 수정 2018.03.18 04:03
  • 댓글 1

2017년 봄, 페이스북에 꽤 묘한 느낌의 웹툰이 등장했다. 선뜻 웹툰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단출하고, 그렇다고 무심히 지나치기엔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만화는 이내 무서운 기세로 독자를 끌어들이며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1년도 채 안 되는 연재 기간에 무려 24만 명에 달하는 독자가 이 만화의 페이지를 팔로우했다. 매회 새로운 에피소드가 업로드될 때마다 삽시간에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며 북새통을 이뤘다. 수많은 사람이 만화 속 주인공이 처한 부당한 상황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며 성토하는 광경은 마치 구름처럼 군중이 모인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극장을 보는 듯했다. 다름 아닌 웹툰 「며느라기」 이야기다.

「며느라기」는 만화가 ‘수신지’가 지난해 5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재를 시작했고 2018년 1월 연재 종료한 작품이다. 곧바로 2월에 단행본을 출간했고 SNS엔 본편의 프리퀄 격인 ‘설맞이 특별만화’를 3회 추가 공개했다. 연재 기간이나 분량에서 다른 웹툰들에 비교해 결코 부피감 있는 편이라곤 할 수 없다. 그러나 화제성과 사회적 반향은 만화 콘텐츠의 역사상 거의 역대 최고가 아닌가 싶다. 불과 연재 반년 만에 ‘2017년도 오늘의 우리만화상’(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주관)을 수상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그만큼 많은 독자의 관심과 지지 속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주도한 작품이었다.

「며느라기」의 범상치 않은 면모는 우선 독자와 만나고 소통한 방식에서부터 드러난다. 오늘날 웹툰 산업은 작가가 제작한 만화를 플랫폼이라고 부르는 디지털 매체(기업)가 연재 방식으로 독자(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구조다. 대개 작가는 플랫폼에 진입해야만 비로소 독자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다. 블로그나 SNS를 통해 작품을 공개하는 건 보통 비상업적인 유통, 즉 아마추어리즘으로 여긴다. 수신지 작가는 기성 작가임에도 기존의 구조를 벗어나 독자 노선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성공했지만 아마도 불안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며느라기」의 실험은 웹툰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소비에 관계된 모든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 ‘레진코믹스 사태’처럼 플랫폼 기반 웹툰 산업 구조에 한계가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며느라기」는 SNS 발 웹툰의 성공적 자립이란 선례를 남겼다. 궁지에 빠진 웹툰계가 위기를 한 발짝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력한 돌파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콘텐츠로서 파격적인 행보에 비교해, 만화 「며느라기」의 서사는 지극히 담담하다. 그림도 차분하고 수수해서 튀는 데가 없다. 꼼꼼히 정독하지 않으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온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들여 읽기 시작하는 순간, 독자는 해일처럼 몰아치는 리얼리티의 카타르시스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며느라기」는 일말의 개그도 판타지도 허용하지 않는 극사실주의 만화다. 어떤 화려한 서사도 수사도 없기에 더욱 강렬한 리얼리티를 구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만화는 독자가 가상의 세계와 인물을 통해 판타지적 유토피아나 화끈한 모험을 대리 경험하기에 적합한 매체다. 그래서 허구적인 스토리를 치밀하고 역동적인 내러티브로 구성해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며느라기」의 독자가 강한 몰입을 경험하는 이유는 오로지 동일시에 의한 공감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인공 ‘민사린’의 시어머니가 식구들이 먹다 남긴 과일 접시를 가져와 “우리 둘이 먹어치우자”고 말하는 장면이나, 첫 명절에 찾아간 시댁에서 민사린이 허리 펼 새 없이 전을 부치는데 거실에서는 남편 ‘무구영’을 비롯한 남자 식구들이 노닥거리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들에서 어떤 독자는 민사린이 느꼈을 인격에 대한 모멸감을 똑같이 느끼지 않았을까? 민사린이 아닌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진 않았을까?

작품과 현실의 경계, 픽션과 실제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독자의 몰입과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펼친 비극 이론에서, 관객이 극 중 등장 인물에게 닥친 불행에 연민을 느끼고 뒤이어 그 불행이 내게도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공포를 느끼는데 이 과정에서 몰입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며느라기」에서 주인공 민사린에게 닥친 당황스러운 현실은 명백한 불행이다. 문제는 속칭 ‘시월드’가 민사린만의 불행이 아닌 대부분의 기혼 여성이 겪는 보편적인 불행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연민의 대상이 등장인물에서 독자에게로 확대되며 만화 속 세상과 현실 세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렇게 「며느라기」는 오랜 시간 동안 도무지 건들기 쉽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가부장 권력 문제를 가뿐하게 공론의 도마 위로 끌어올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 위에 존재해 온 것이 가부장 권력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가부장 권력은 그 무엇보다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구태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가치라는 명목과 가족이라는 이름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통해 공고히 유지돼 왔다. 「며느라기」의 민사린처럼, 대한민국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결혼을 선택하는 순간 시댁이라는 낯선 가족 공동체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지극히 사적이라서 편입되기 전까진 좀처럼 속성을 가늠할 수 없는 그곳으로 말이다. 그러나 어렵사리 「며느라기」의 실체에 눈을 뜬 민사린의 눈에, 그리고 독자의 눈엔 이제 세상이 온통 일그러져 보인다. 가부장적 위계에서 비롯한 폭력적 질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들의 정서와 사회 시스템에 뿌리내려 왔다. 고개를 돌리면 어디에나 비뚤어진 광경이 풍경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이야기 종반에 민사린이 주례선생을 만나러 나와 카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 장면은 독자를 몹시 먹먹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서, 위대한 그리스의 철학자는 비극의 결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 내에서 결말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전지전능한 신이 등장해 문제를 해결하고 불행을 제거하는 결말에는 아무도 공감할 수 없다. 더욱이 현실에는 그런 해결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며느라기」라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겪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주인공인 이 세계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수신지 작가가 연재 종료 후 후기에서 제안한 것처럼, 「며느라기」의 마지막 회를 덮고 나서 우리는 “어떻게 할지” 스스로의 결말을 만들기 위해 움직여보면 어떨까.

이기진
한국예술원 디자인예술학부 웹툰전공 교수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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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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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ㅎㅖ영 2018-03-20 21:28:26

    읽는 내내 숨쉬듯 공감했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느꼈던 부분들이라... 소름돋았어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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