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규 교수
사회교육과

자연대 계산통계학과와 인문대 철학과를 거쳐 사범대 사회교육과에 몸담고 있는 필자는 복잡한 이력으로 인해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보통은 서양 철학이라고 대답하지만, 세부 전공을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엔 ‘사회철학 또는 윤리학’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상대가 뭔가 좀 부족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주요 연구주제가 ‘공화주의’(republicanism)라고 좁혀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질문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최근에는 더 좋은 대답을 찾아냈는데, ‘민주주의’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더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면 이번에는 필자 자신이 미진하다고 느낀다.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렇게 뭉뚱그려 말해 버려도 될까? 혹시 민주주의와 관련된 구체적인 현안들에 대해 의견을 구하면 어떻게 하나? 민주주의를 전공한다고 하면 행동도 민주적이어야 할 텐데,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필자를 가장 괴롭히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정말 민주주의가 뭘까?’

민주주의 전공자(?) 입장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단순히 엄밀하게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 이상의 원리적 난점을 지닌다. 우선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에는 존중이 반드시 포함되므로,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전제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항상 자기 부정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해 이의제기할 수 없으면 다원성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에는 고정불변의 목적이 부여될 수 없다. 민주주의가 독재에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독재를 극복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까지 낱낱이 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종종 민주주의를 그것의 실행 결과보다는 실행 과정을 통해, 즉 절차적으로 구현하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자들은 모두 입법부로서 의회의 역할을 중시한다. 그중에서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개인의 고유한 사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특히 사법적 절차를 통해 이를 구현하려고 한다. 반면에 공화민주주의자들은 대체로 민주주의를 공적 권리, 또는 공적 자유의 활성화로 이해하며, 사법적 절차보다는 행정적 절차 및 국민의 직접 참여를 통해 이를 구현하려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이 중에서 공화민주주의를 연구,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이처럼 절차주의적, 공화민주주의적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미결정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술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언제든 자기 부정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필자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전공자에 걸맞은 식견과 태도를 보여주기를 원하면, 필자는 민주주의에 대해 단정적이거나 속 시원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자기부정적인 대답을 하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필자로서는 질문자와 필자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전공을 소개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서양 철학 전공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민주주의를 잘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개인적으로 안도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을 원용하자면,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회철학 및 윤리학 전공자로서 필자는 이처럼 중요한 민주주의의 미결정성을 계속 더 깊이 연구하고 해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친절하게 세부전공을 물어주시는 분들께는 죄송스러운 일이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지 않고서 민주주의를 전공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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