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집과 외상장부
대머리집과 외상장부
  • 대학신문
  • 승인 2018.03.18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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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림
미술평론가

최근 주재환 작가의 작품 ‘외상장부’(2010)를 촬영할 일이 있어 부암동에 위치한 자하미술관에 갔다. 주재환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대폿집 ‘명월옥’(明月屋)의 외상장부를 두 쪽 단위로 확대 복사한 후 형광펜 등으로 외상내용을 하나씩 확인했다고 한다. 명월옥이라니, 참으로 예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명월옥은 ‘대머리집’으로 더 자주 불렸다. 아마도 명월옥이 주로 대머리집로 불렸던 이유는 장난기가 많은 어떤 손님이 밝은 달을 뜻하는 ‘明月’에서 대머리를 떠올렸거나 혹은 대머리집의 전신인 만화옥(萬華屋)의 창업자 고 김영덕 씨가 대머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대폿집은 이름의 유래만 따져보더라도 호기심이 생기는 곳이다.

1950년대부터 1978년까지 사직공원 맞은편에서 영업했던 대머리집은 막걸리, 소주, 생선 찌개, 묵무침, 두부구이 등을 파는 평범한 대폿집이었다. 비록 이처럼 평범한 차림표를 가진 대폿집이지만, 정계, 학계, 예술계, 언론계 손님들에게 대머리집은 맛, 인심, 신뢰, 정보가 넘치는 명소 중의 명소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자들이 이 대폿집을 많이 찾았는데, 그 이유는 광화문에 신문사가 많았던 탓인 듯하다. 그렇다 보니 대머리집은 자연스레 신문계의 인사이동, 구인구직, 특종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는 거점이 되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기자들에게 대머리집은 기자협회보와 다를 바 없었나 보다.

대머리집에 오는 손님은 많기도 하고 다양하기도 하니 각양각색의 외상 손님도 줄을 이었다. 그런데 신용카드도 없던 시절에 대머리집을 찾는 손님들은 어떻게 외상을 그었을까? 대머리집의 외상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그리고 주재환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대머리집의 외상내용이 기록된 장부에 대해서 짧게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50~70년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요즘 세대라면 대머리집의 외상장부가 여러모로 신기할 수밖에 없다. 가령 대머리집의 외상장부가 실명 대신 외상을 긋는 손님의 특징이나 별명을 적는 방식으로 운용된 경우가 그렇다. 이는 1900년대 초 선술집의 외상 방식이 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 선술집의 단골들은 잔술을 외상으로 마시곤 했는데 선술집 주인들의 문맹률이 높아 글을 사용한 외상장부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외상 손님의 인상착의를 벽에 그린 후 손님이 마신 잔술의 수를 그 옆에 선으로 긋는 방법이었다. 이런 점에서 대머리집이 외상 손님의 특징과 별명을 장부에 사용한 것은 1900년대 초 선술집의 전통 중 일부가 자연스레 전승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외상장부’의 토대가 된 외상장부 3권은 대머리집 2대 주인 고 이종근 씨가 간판을 내릴 때 극작가 고 조성현에게 양도한 것이다. 대머리집의 단골이었던 조성현은 평소 이종근 씨에게 이 외상장부가 민간사업사 차원에서 의미가 깊으니 잘 보관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 이런 사연을 잘 알고 있던 주재환은 어느 날 조성현에게 대머리집의 외상장부를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기획전 ‘광화문 연가(年歌), 시계를 되돌리다’(2009)에서 공개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조성현은 그 제안에 찬성했고 이와 더불어 주재환의 ‘외상장부’도 탄생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주재환의 ‘외상장부’를 보다 보면 외상값을 수금하러 다니는 대머리집 주인의 집념에 경탄하게 될 것이고 더불어 그 단단하고 두꺼운 집념에 슬며시 그리고 세심히 손을 걸친 작가의 해학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외상장부’를 살펴보면서 주재환이 대머리집에 어떤 이들이 드나들었으며 외상값은 누가 갚았고 누가 갚지 않았는지를 천천히 더듬는 주재환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사라진 대폿집의 외상장부를 더듬는 과정은 외상값을 할부로 갚게 하기도 하고 미수금이 있거나 뚜렷한 직장이 없는 손님에게도 외상을 허락했던 정겨운 시절을 마음속에 고쳐 새기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왜냐하면 누구든 지금처럼 인간의 삶과 사회가 경제적 가치 확장이라는 단일논리에 지배당하는 시대를 버텨나가다 보면 그나마 마음속에 새겨졌던 그 정겨움조차 서서히 마모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다시 고쳐 새길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머리집 같은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정겨움을 경험하기 어려운 시대에 성인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해가 갈수록 정겨움을 경험하는 삶은커녕 무시무시한 생존경쟁으로 얼룩진 현실이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거듭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외상장부’를 처음 봤을 때는 마냥 신기하고 흥미로웠지만, 보면 볼수록 막연히 내가 뭔가 중요한 것을 상실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괜스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엇을 상실했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외상장부’를 계속 바라보았지만, 해답은커녕 막연한 불안감만이 나의 주변을 계속 맴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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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림 평론가는 시각예술에 대한 전시기획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정치와 예술이 어떻게 마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으며, 웹진 '크리틱-칼'(www.critic-al.org)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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