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이번 정부는 국민청원제도를 실시해 한 달간 20만 명 이상의 청원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오면 정부나 정부 관계자가 직접 답변하고 있다. 최근 하루만에 26만명의 청원 수를 돌파해 최종적으로 60만명이 청원한 사례가 있었다. 지난 평창 올림픽에서 일부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 운영방식과 인터뷰 태도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던 사건이다. 경기 직후 두 선수의 대표자격을 박탈하고 관련 연맹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청원 요청글이 올라왔다. 지금까지 정부의 답변을 받은 사례들의 최종 청원인 수가 대개 20만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으로 ‘짧고 굵은’청원 열기였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 운영방식이나 사후 태도가 성숙하지 못했던 것은 대다수가 문제라고 느낄 만도 했다. 하지만 그 잘못과 별개로, 국가 공무원도 아닌 선수 개인의 사적 권익인 자격 박탈이 열렬히 논의되는 장이 다른 곳도 아닌 국민청원이었다는 점은 의아하다. 물론, 국민청원제도는 국민신문고 제도와 달리,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사람도 원하는 조치를 정부에 촉구할 수 있도록 청원 이슈의 범위를 넓게 열어두고 있다. 약자의 목소리가 잘 들릴 수 없는 구조에서 다른 사람들이 대신 목소리를 내 공권력 집행이나 법안 촉구 근거에 힘을 실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청원 가능 사안의 범위가 비교적 넓다고 하더라도, 그 사안의 해결과정에서 공권력의 힘을 호소할 필요가 있을 때, 그리고 사건 당사자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공적이익이 증진되리라는 예상이 가능해야 진정한 의미의 ‘국민’청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수의 청원인이 있었지만 정부의 답변은 거시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빙상연맹 자체의 자정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면서 “‘스포츠공정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스포츠 비리 문제에 대한 정책 대안을 만들 것”이라고 비서관의 입을 통해 국민청원 홈페이지에서 간접적으로 밝혔다. 예상했던 것만큼이나 당연한 결과다. 현재 국민청원제도는 청원법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현행 청원법에 명시된 법적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청원’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으로 법조계에선 해석하고 있다. 실상 국민청원제도는 정부의 입장에서나 국민의 입장에서나 ‘제도’라는 말이 다소 무색할 만큼, 여론을 살피는 정도의 기능만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한다는 국민청원의 상징성을 인정해줘 그 실효성에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룰 수도 있다. 어차피 청원 내용 그대로 실행되기는 어려우니 일단 내키는 대로 요구하면 그만인 것일까? ‘공정하고 깨끗한 스포츠 선수 육성 문화를 만드는 데 정부가 힘써달라’는 요구보다는 선수 개인의 지위 박탈 요구와 대리 보복성 비난으로 점철된 청원 운동을 내내 지켜봤을 선수 당사자와 그 주변인들이 심리적으로 받았을 고통은 굳이 캐묻지 않아도 자명하다. 사건의 정확한 전후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채 잠정적 피해자의 대변인이 돼, 누군가의 사적 권익을 뒤흔들어 달라고 대신 떼를 쓰는 장소가 ‘국민’청원이 돼선 안 될 것이다.

국민청원에 올라오는 모든 청원들이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정말 공론화될 필요성이 있고, 심층적인 정책적 논의와 관심이 필요한 사안들도 있다. 그러나 한 달에 약 2만 건의 글이 올라오는 가운데 그 청원운동 자체가 반대로 누군가에게 뚜렷한 해(害)가 될 수 있다면, 반면에 정부가 실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과 그 기반이 모호하다면, 무엇에 무게를 더 둬야 할까. 제도는 상징성이나 의미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김빈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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