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악점역을 알아보다

음악 교정사가 점자 리더기로 점역된 악보를 검토하고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은 소리의 세계에 산다. 소리와 친밀하다 보니 이들의 관심이 음악으로 옮겨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시각장애인이 음악에 대해 정확히 알고 연주하려면 각자의 청음에만 의존하는 것으론 역부족이다. 이들을 위해 세밀한 음악적 기호를 표현해줄 수 있는 점자악보를 만드는 일을 ‘음악 점역’, 악보 번역을 전담해 점자 악보를 만드는 사람을 ‘음악 점역사’라 부른다. ‘한국점자연구위원회’가 ‘개정 한국 점자 통일안’을 발표한 후 음악 점자 기호가 통용된 것은 1994년, 그 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점자 악보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1999년의 일이다. 현재 점자 악보는 국내 60명 내외의 음악 점역사의 손에서 만들어지며 시각장애인과 음악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음악 점역이 선사한 악보와 함께하는 삶

음악 점역사는 시각장애인이 요청한 곡을 중심으로 점자 악보를 만든다. 이외에도 음악 점역사가 점역될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한 악보나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선정한 악보가 점역되기도 하는데, 그 장르는 매우 다양하다. 점역해보지 않은 음악 장르가 거의 없다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음악 점역팀의 양민정 팀장은 “시각장애인들이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연주곡과 같은 클래식 장르부터 성악곡, 합창곡, 드럼, 기타나 오카리나 곡 그리고 일반 대중가요까지 의뢰한다”고 점자 악보의 다양성에 대해 말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요 ‘산토끼’의 점자 악보다.

점자 악보는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먼저, 음악 점역 시험을 포함한 3개 과목의 점역 시험에 응시해 자격증을 취득한 음악 점역사가 악보를 분석한 후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이를 점역한다. 이 과정에서 음악 점역사는 악보에 쓰인 여러 개의 음악 기호를 분석해 점자로 재구성한다. 이들은 단순히 악보에 있는 음표, 빠르기, 셈여림 등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악보를 분석해서 정확하게 점역한다. 점자 악보의 각 음악 기호는 한국점자연구위원회가 발표한 음악 점자 표기 규칙에 따라 6개의 점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도’는 1번, 4번, 5번의 점이 돌출되도록, ‘레’는 4번, 5번 점이 돌출되도록 해 각각의 음계를 점자로 표현할 수 있다.

음악 점역사의 점역이 끝나고 나면, 시각장애인인 음악 교정사가 점역된 점자 악보를 상세하게 읽어나간다. 점역사는 교정사가 점자 악보를 읽는 것을 들으며 바르지 않게 표현된 부분이 없나 확인하면서 교정 작업을 진행한다. 이들은 아무리 복잡한 악보라도 시각장애인이 읽고 연주할 수 있도록 점자 악보를 만들어야 하므로 악보의 작은 부분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양 팀장은 “점자 악보를 의뢰하는 시각장애인이 비시각장애인과 연주를 하는 경우에도 이들이 서로 원활하게 소통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정확하고 섬세하게 악보를 점역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최종적으로 점역사가 검수 절차를 한 번 더 거치고 난 후엔 출판이 진행된다. 양 팀장은 “검수 과정에서 일부 음악 기호를 어떻게 해석해야 효과적일지 확실하지 않을 땐 해당 악보가 연주되는 동영상을 보거나 여러 버전으로 출판된 시중의 악보를 검토하는 작업을 한다”며 “복지관 내의 음악 점역사들끼리 논의가 끝나지 않을 땐 자문위원을 초청해서 회의를 하기도 한다”고 점자 악보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얼마나 섬세하게 만들어지는지 설명했다. 위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점자 악보의 길이는 일반 악보에 비해 짧으면 2.5배, 길면 4배 정도로 길다. 음악 점역사와 교정사는 이 점자 악보를 만들어내기 위해 꼬박 일주일을 투자하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된 점자 악보를 통해 시각장애인은 음악과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관현맹인예술단’의 일원으로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는 시각장애인 이진용 씨는 “예전엔 주로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점자 악보가 보급되고 나선 청음에만 의존할 때 미처 듣지 못한 부분도 들을 수 있게 됐다”며 “점자 악보를 통해 음악을 더욱 자세하고 세부적으로 대하는 게 가능해졌다”고 점자 악보가 그의 음악 활동에 미친 영향을 설명했다.

더 많은 시각장애인이 악보로 음악을 즐기려면

점자 악보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에 비해 음악 점역 전문 인력이 턱없이 적어 아직도 악보의 수는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국립장애인도서관에 따르면, 해당 도서관이 수집한 전자점자악보는 총 1,938건이다. 이는 시중에 나와 있는 일반 악보와 비교했을 때 절대적으로 적은 양이다. 국립장애인도서관의 사서주사보 양이선 씨는 “전국의 장애인도서관이 보유한 대체자료를 공유하는 시스템인 국립장애인도서관의 국가대체자료공유시스템에 등록된 점자악보는 3,600건”이라며 “이에 참여하고 있는 국내 장애인도서관은 총 36곳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사립장애인도서관의 소장 자료 원문공유가 원활하지는 않은 상황”이라며 더 많은 점자 악보가 공유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밝혔다.

점자 악보를 제작하는 데 있어 정부의 더 많은 지원도 절실하다. 양 팀장은 “점자 악보 제작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적인 지원이 꼭 필요한데, 현재 재정적인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며 “국가에서 지원하는 점자 악보에 대한 사업비가 늘어난다면 더 많은 음악 점역사가 점자 악보를 제작할 것이고, 이에 따라 점자 악보의 장르가 점차 다양해질 것이다”고 말했다. 덧붙여 이진용 씨는 “점자 악보를 만드는 소프트웨어가 더욱 발달해서 보다 자세한 점자 악보가 신속하게 많은 시각장애인에게 전달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점자 악보가 발전해나가야 할 부분을 짚었다.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누군가에겐 절실한 것일 수 있다. 점자 악보도 마찬가지다. 비시각장애인은 서점에서 쉽게 악보를 사서 연주하고 싶은 곡을 마음껏 연주할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원하는 곡을 연주하기 위해선 점자 악보가 번역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들이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음악을 누리고 문화를 즐기며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해선 사회적인 관심이 절실한 상황이다. 점자 악보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이에 대한 지원이 더욱 활발해져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시각장애인이 음악의 세계에 더욱 빠져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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