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강 사진부장

전문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랜 시간 공들여 화려한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장인(匠人)을 예로 들어보자. 완성품을 선보인 장인에 대해, 우리는 한 분야의 독보적인 위치에 도달한 그를 높이 사 그의 전문성을 치켜세우고 작품의 심미적 위대함에 감탄한다. 그러나 분명 도예가의 작업공간에서도 분업은 이뤄진다. 흙을 다지고 연장을 닦는 기본부터 무늬를 새기기까지 이 모든 과정을 장인과 더불어 수많은 수습생이 함께 수행한다.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하나의 도자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분업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개인의 ‘전문성’을 모아 집단의 효율성을 높이고 더 짧은 기간에 큰 성과를 낼 수 있게 됐다.

연구의 산지, 실험실에도 이와 비슷한 생태계가 조성된다. 이곳에선 교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연구원과 대학원생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물론 교수는 팀원들을 이끌고 비전을 제시할 중대한 임무를 짊어진 사람이며, 교수 개인이 발휘한 독보적 천재성을 바탕으로 기념비적 연구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점차 연구에 필수적인 장비와 절차가 복잡하고 다양해지면서 오늘날엔 탁월한 ‘연구자’가 아닌, 뛰어난 ‘연구팀’이 필요해졌다. 과연 우리는 연구팀에 속한 모든 개인의 기여도를 인정하고 있는가?

한 영역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적지 않은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장인’의 공로를 치하할 뿐 장인의 그림자에 서서 그를 돋보이게 한 수많은 ‘수습생’들에겐 충분한 조명을 비추지 못하는 듯하다. 이는 과학적 성과에만 열광하고 과정에 주목하지 않는 풍토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젠가 기초과학 분야 연구실에 다니는 대학원생 선배가 실험실의 암묵적 불문율을 얘기해준 적이 있다. 바로 “너 지금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거 해서 교수할 수 있어?”와 같은 질문들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전까지, 그럴듯한 학교 또는 번듯한 직장에 자리 잡기까지, 우리 사회는 당장 ‘쓸 데’ 없는 공부를 계속하는 이들에게 냉혹하다. 장인이 되고자 치열하게 배우는 이들의 수련 과정을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할 뿐이다.

산업에 즉시 투입될 수 있는 응용 분야에 비해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 또한 ‘수습생’들을 힘들게 하는 요소다. 대중은 사람과 사회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는 기초 특히 자연과학 연구에서도 실용적 가치를 찾는다. 물론 당장 기술 개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연구도 있고, 정치·사회적 필요에 의해 특정 과학기술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기술은 탄탄한 기초과학 연구를 토대로 한다. 일례로 산업혁명의 견인차 구실을 한 증기기관은 제임스 와트의 기발한 생각만으론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와트의 증기기관 이전엔 뉴커먼기관이 있었고, 기압과 진공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했다. 이처럼 학계의 ‘작은’ 진보를 일군 기초 연구들은 후배 과학자가 참고할만한 ‘큰’ 발자취를 남기며, 그 과정엔 자연과 과학에 대한 ‘사소한’ 질문을 던지는 교수와 이 질문들을 붙잡고 고민하는 수많은 개개인의 일상이 담겨있다.

많은 과학자는 연구과정이 마치 작은 돛단배에 올라 망망대해를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밤하늘에 듬성듬성 박힌 별처럼 눈앞에 던져진 소수의 선행 연구를 지표 삼아, 육지의 윤곽선조차 보이지 않는 바다를 조금씩 더듬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항해를 하는 ‘선장’ 격의 연구자와 그의 ‘선원’들은 핵심적인 과학기술의 열매를 움켜쥐는 그 날을 위해 쉴 새 없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잊히기 마련인 ‘선원’들의 노고는 모든 위대한 연구에 녹아있고, 이들이 남긴 데이터는 적소성대(積小成大)해 후배 연구자의 길잡이가 되고 있으며, 나아가 후세대 기술자에게 번뜩이는 영감을 줄 아이디어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니 부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자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우고 공부하고 실험하는 누군가에게 “그런 일 해서 뭐해”와 같은 질문은 던지지 말자. 끝없는 바다 위에서 치열한 발길질을 계속하는 이들이 더는 외롭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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