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 상하이와 난징의 위안소를 가다

위안소, 보존해야 하는 것인가?

작년 9월 부산시의회에서 “영도다리와 가까운 2층짜리 목조건물(사진①②)이 과거 일본군 위안소로 운영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나라엔 터로만 남아있다고 전해지던 위안소가 실제 건물로도 남아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된 셈이다. 실제로 해당 건물은 고 윤두리 할머니가 제1위안소에 대해 증언했던 내용 가운데 위치나 건물 구조 등에 있어서 상당 부분 유사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제기된 후에도 해당 건물은 몇 달 동안 방치된 채 주변 호텔 공사로 인한 붕괴가 점차 진행됐으며, 올 3월에야 조사단을 꾸려 실질적인 조사에 들어가게 됐다.

위안소는 전쟁 범죄의 실제적 증거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의 저자 윤명숙 씨는 여성 개인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위안부 제도’란 용어 대신, 큰 틀의 구조에서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관점에서 ‘위안소 제도’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저작비평회에서 ‘위안소 제도’를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징모하고, 위안소를 운영하고, 이송하고, 위안부를 귀환시키는 것”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위안소는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인 ‘위안소 제도’를 이야기할 때 그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현재 위안소 건물을 보존하는 것에 대해선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위안소를 보존해야 할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현실적인 개발 이익과 그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삶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①
사진②



난징 이제항위안소 유적 진열관

난징은 과거 50여 개의 위안소가 존재했던 지역이다. 그 중 ‘이제항위안소’는 기존 건물을 위안소로 이용한 사례인데, 1937년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후 이제항 2호는 ‘동운 위안소’, 이제항 18호는 ‘고향루 위안소’ 로 개조됐다. 이중 동운 위안소는 고 박영심 할머니가 갇혀 있던 곳으로, 중국에선 유일하게 외국인 위안부가 고통을 겪었던 현장으로 직접 지목한 위안소다.

지난 2월 찾은 ‘이제항위안소 유적’(사진③)은 난징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다. 실제로 위안소로 쓰이던 건물에 박물관을 개장한 것이기 때문에 건물의 좁은 복도와 가파른 계단, 이어지는 쪽방들로부터 당시의 위안소 구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전시관 내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물품, 매표소 시설을 복원한 방, 조각상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ENDLESS FLOW OF TEARS’ 등의 예술 작품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전시품을 집대성했다. 위안소 보존의 모범적인 사례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곳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98년 현장이 발견된 뒤 오랜 기간 방치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2008년엔 외부 골격만 남고 전소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징 시 정부를 끊임없이 설득한 쑤즈량 교수의 노력으로 2014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후 정비를 마쳐 2015년 위안부기록관으로 개장하게 됐다.

사진③



다이살롱

1931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뒤, 쑤즈량 교수(상하이사범대)가 추산하기로 170여개에 이르는 위안소가 도시 곳곳에 건설됐다. 특히 일본 해군 사령부가 있던 훙커우 구에 다수의 위안소가 운영됐으며, 그 중 ‘다이살롱’(사진④⑤)은 국제 학계에서 인정받은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다.

최근 찾은 다이살롱 건물은 중국 주민들의 거주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건물 자체의 원형은 잘 보존돼 있었으나, 주변 낡은 주택들과 구분되는 점 없이 어우러져 있어 위안소로 사용되던 옛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훙커우 구 관계자는 중국 광명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곳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곳이 세계 최초의 위안소로 알려지며 전 세계 언론 매체, 외교관, 역사가가 방문하는 발길이 잦아진 만큼 주변 주택들과 구분되는 표지 또는 기념비가 필요해 보였다.

사진④
사진⑤


위안소,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이 과거 흔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위안소의 보존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술집이나 음식점으로 이용되던 특성상 위안소 건물은 대개 주택가나 시내에 위치해 있고, 주민들의 거주 지역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위안소인 ‘어메이루 400호’(사진⑥⑦)는 당시 매표소 터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현재 거주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취재 당시엔 아파트 증축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난징이제항 유적의 사례에서 시내 한복판의 유적을 유지하기 위해 개발 이익을 포기해야 했으며, 유적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거주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에도 비용이 들었다. 또한 존재하는 수많은 위안소들을 모두 보존해야 할지도 쟁점이 될 수 있다. 쑤즈량 교수는 “일본군 위안소의 모든 장소를 보호해야 할 필요는 없다. 상하이에는 170여 개의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지만 그중 한두 개만 보존하면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증거로써 위안소 보존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쑤즈량 교수는 “위안소를 유지하고 박물관을 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의 잔학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전쟁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미래로 나아가도록 도와준다”며 위안소 보존의 가치를 역설했다.

지날 2월 27일 서울시청에서는 국제 컨퍼런스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현재와 미래’가 열렸다. 이날 참석한 중국 지린성 당안관의 자오위지에와 뤼춘위에는 “일본 정부가 역사 왜곡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더 설득력이 있는 기록문서와 증언, 유적을 찾아 법적 조사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위안부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장기적인 과제라는 의견을 뒤이어 밝혔다. 이와 같은 목적에서 일본의 여성인권단체 WAM(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은 피해자의 증언과 공문서 기록, 일본군의 증언을 수집해 이 정보들을 기반으로 전 세계 위안소가 있었던 곳을 아카이빙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WAM의 위안소 지도에 따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곳은 동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인 베트남과 필리핀, 심지어는 미국까지 총 22개국에 이른다.

사진⑥
사진⑦

취재 후 방문한 상하이 사범대 교정에선 중국 최초로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볼 수 있었다. 노란 목도리를 두른 두 소녀의 옆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조각상 뒤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We can forgive, but we can never forget’.

위안소 제도는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이며, 일본 정부가 이를 자꾸 왜곡하는 상황에서 잊히지 않고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선 증거가 필요하다. 현재 국내외의 다양한 연구팀 및 단체에선 새로운 증언, 기록, 유적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기존의 아카이브와 연결지어 해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위안소의 실제 건물을 보존하는 문제는 현실의 경제적, 인적 문제와 깊이 얽혀 있다. 위안소의 보존 가치를 판단하고 그 방향을 정하기 위해선 많은 고민과 가치판단이 우선돼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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