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원 강사
미학과

지난 겨울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미투(#MeToo) 운동은 문화·예술계와 학교를 거쳐 정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전 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잇달아 터져 나오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진술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성폭력에 관한 문제가 구조적인 문제인 동시에 인권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성폭력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나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피해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이런 부분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 조금씩이나마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고무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정치계로 확산된 미투 운동에서 특정 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성폭력 행위에 대한 진실공방이 시작되고 미투 운동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음모론, 진실공방, 미투에 대한 대처법 등 갖가지 틀이 덧씌워지면서 이 운동이 제기했던 핵심적인 문제는 다른 문제들, 예를 들어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각종 의혹들, 가짜 뉴스들과 그것을 둘러싼 의혹들, 그리고 이에 대한 피로감의 토로들로 덧씌워지고 있는 듯하다.

최근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젠더 논의에서 성은 더 이상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결과물이 아니다. 적어도 여기선 다섯 개의 성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젠더와 성적 지향의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직도 성 평등을 부르짖어야 할까?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분류체계는 사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인간 공동체에 문명이 자리 잡은 이래로 권력은 언제나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졌고, 여기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여성이 권좌에 오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예외일 뿐, 권력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왜 그럴까? 이데올로기의 가장 단순한 정의가 ‘신념 체계’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성을 중심부에 위치시키고 여성을 주변부 혹은 타자로 만들어버리는 가부장제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를 자연스럽게 보이게끔 하기 위해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왔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마도 전형적인 남성 이미지와 여성 이미지를 설정한 후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었으리라. 이 이미지들은 동화를 통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를 길들여왔고, 그 결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전형적인 남성/여성 이미지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됐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마련해 둔 전형적인 남성 이미지가 ‘강인한 보호자’인데 반해,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는 언제나 ‘순종적이고 인내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는 모두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수행한 결과 왕자님과 결혼했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그들의 영원한 행복 뒤에는 아마도 여전히 순종적이고 인내하는 아내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전형적인 남성/여성 이미지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하다. ‘강인한 보호자’의 역할을 맡은 남성들의 삶도 쉽지는 않겠지만, 여성의 삶은 그보다 훨씬 끔찍해 보인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여성은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겐 언제나 성적 대상으로 여겨질 뿐이었고, 지금도 그런 것만 같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동화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확대·재생산을 돕는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빠는 출근”을 하고 “엄마는 안아주는” 전통적인 성 역할을 답습하는 “뽀뽀뽀”를 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들이 암묵적으로 생산하는 케케묵은 남성/여성 이미지의 실제 모습과 오늘날 필요한 양성의 문제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긴 시간을 두고 해야 할 일이다. 미투 운동을 두고 벌어지는 의혹과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당장 해야 하는 것은 여성이 성적 대상이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인간, 인격을 가진 인간임을 주장하는 일일 것이다. 미투 운동은 바로 인권, 그 중에서도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이며,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고루한 시각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내가 여전히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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