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빈 학술부장

“진실을 말한다면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남긴 명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진실만을 말해도 들어줄 생각 없이 진실 이상의 증거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을 두고 중세의 마녀사냥 같은 집단적 광기라고 답답해하기도 어렵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포장 하에 결백을 입증할 진실 그 자체를 입증할 증거가 필요하다는 말장난을 일삼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실을 요구한다”는 말이 맹목적 믿음에 기댄 악다구니 이상의 힘을 가졌던 이유는 모순적이지만 ‘이성’에 있다.

감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감정에 오도되지 않고 최대한 냉철하게 상황을 바라보려 한다. 그 도구가 되는 ‘자신의 이성’을 제외한 모든 것을 말이다. 자신의 이성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을,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실 자체가 이미 왜곡됐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잊고 산다. 사실 진짜 의심해야 할 적은 내부에 있다. 바로 자신의 이성이다.

이성은 절대 완벽하지 않다. 겉보기에 이치에 맞아 보인대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부조리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영화 <더 헌트>(2012)는 집단의 이성이 어떻게 엇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유치원생 클라라가 즉흥적으로 지어낸 거짓말은 주인공인 루카스를 순식간에 범죄자로 만든다. 루카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를 범죄자로 몰아가는 것은 이성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것도 이성뿐이다. 루카스는 인간 이성의 산물인 법의 도움을 받아 무죄를 입증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의 무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도 그의 유죄를 판단하는 데 이용된 자신의 이성이 잘못됐으리라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진실의 힘이 세다고 말하지만, 시간의 비가역성 앞에서 진실은 아무런 힘이 없다. 정황증거가 됐든 각종 분석 같은 직접증거가 됐든 진실 혹은 진실을 뒷받침할 무언가를 내놔도 사람들은 더 이상 설득되지 않는다. 그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 또 있을까. 이미 확고한 판단을 내려버린 사람들은 인정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틈조차 없게끔 이성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다.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왜 진실을 말하지 않았냐며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한다. 정작 그들이 진실을 이야기할 때는 귀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어쩌면 의심의 눈초리 앞에 선 개인이 내뱉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은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라는 한 마디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하지 않은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변명이 되고 소위 ‘쉴드’가 되는 세상이다. 그 말을 하지 않았다고 거듭 주장하면 그 말 대신 무슨 말을 했는지 해명해보라는 말까지 나온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해명하라는 말 자체가 이미 난센스지만, 굳이 해명을 하고 사실을 밝히면 그럴 리가 없다며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한다. 그렇게나 찾아대던 진실은 정작 이성에 기반을 둔 의심 앞에서 철저히 외면당해버린다.

때로는 정말 무고한 사람이 순식간에 죄인이라는 낙인을 얻기도 한다. 그는 진실만을 말하지만, 신뢰를 얻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결백을 뒷받침할 증거들이 발견된다고 해도 평생 찜찜함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도 없을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라고? 현실에서 계속해서 일어났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의 이성이 완벽하지도, 그렇다고 실수를 쉽게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마크 트웨인의 또 다른 명언을 인용하며 글을 줄인다. “진실은 소설보다 더 기이하다. 소설은 가능성이 있는 일을 그려야 하지만, 진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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