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행사 | 2017년 공쿠르 신인상 수상 작가 마리암 마지디와의 만남

마리암 마지디 작가는 “서울에 와 여러분을 뵙게 돼 굉장히 기쁘다”는 인사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이 끝난 후 청중들의 질의응답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지난달 29일 서울도서관에서 ‘마리암 마지디와의 만남’ 행사가 열렸다. 마리암 마지디는 자전적 소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원제: 마르크스와 인형)으로 2017년 프랑스 공쿠르 최우수 신인상과 우에스트 프랑스 문학상을 수상한 이란 출신 작가다. 그는 이번 행사에서 이란과 프랑스라는 서로 다른 나라 사이에 놓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그 속에서 언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 말했다. 이번 강연은 출판사 ‘달콤한책’ 김도연 대표가 사회를 맡고 최미경 교수(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한불전공)의 순차 통역으로 진행됐다.

마리암 마지디 작가는 1980년 이란에서 태어나 1986년까지 어린 시절을 이란에서 보냈다. 1986년 부모님이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길에 오르면서 작가도 프랑스에 정착했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에선 이 과정에서 생겨난 두 정체성의 갈등과 화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첫 번째 정체성을 말소하고 두 번째 정체성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정체성에 두 번째 정체성이 보태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에 체류하며 그의 내부에 차츰 두 번째 정체성이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이란과 프랑스의 두 정체성은 오랫동안 작가 내부에서 경쟁해왔다. 마리암 마지디 작가는 이란을 떠나온 지 17년 만에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면서 두 정체성 간의 오랜 불화상태가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태어났던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돌아갔을 때 두 정체성이 어느 정도 화해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프랑스와 이란, 두 정체성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서로 다른 두 나라에서의 생활은 정체성 갈등에 그치지 않고 언어의 갈등으로도 이어졌다. 마리암 마지디 작가는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면서 언어와 관련된 소설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어린 마리암 속에선 두 언어가 갈등하고 투쟁했다. 이는 “두 언어가 공존할 수 없으며, 유일한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의 생각은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이란의 시인 우마르 하이얌과 소설가 사데크 헤다야트를 주제로 비교문학 석사 논문을 쓰며 달라졌다. 그는 이 과정이 “이란 문학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이란 문학이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며 이는 “나의 내면에서 페르시아어와 프랑스어를 화해시키는 의식”이라고 표현했다.

이란을 떠나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마리암 마지디 작가의 소설에는 이란 문학작품의 특성이 많이 드러난다. 그는 “페르시아어 전공자들은 내가 이란의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을 차용한다고 평한다”며 “무의식적으로 이란 문학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어머니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페르시아어로 시를 쓰고 그에게 읽어주곤 했다. 실제로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에는 어머니가 글을 쓰는 모습이 묘사된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나도 10살 무렵부터 26살까지 시만 썼는데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리암 마지디 작가는 앞으로도 작품 활동을 계속할 계획이라며 다음 작품도 이란이 주제가 될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망명한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상실했고, 상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정서가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런 정서는 작가 자신의 근원과 고국을 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그는 “이란에 대해 탐구하려는 시도가 내 속에서 나타나는 듯하다”며 “이란은 고갈되지 않을 주제”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 이란에 관해서 글을 쓴다면 독자들이 지겨워할 수도 있겠다며 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는 작가가 느낀 상실을 보상하려는 조치임은 확실하다”며 앞으로도 그의 상실을 추구하는 글을 쓸 것이라 확신했다.

1시간 반 남짓 진행된 강연에선 그의 소설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란의 정치적 상황, 검열 문제, 난민 문제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마리암 마지디의 소설은 검열 문제 때문에 이란에서 출판되지 못한 상태다. 그는 “이란에서는 예술의 기능이 이미 말소한 상태”라며 이란의 영화 검열을 예로 들었다. 이란에선 2005년까지 해외 영화를 검열하는 데 맹인검열관을 고용했다. 그는 “검열관의 조수가 영화 장면을 묘사하면 맹인검열관은 여성의 존재 여부, 히잡 착용 여부를 묻는 식으로 검열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은 해외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검열관으로 고용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제가 개방되는 등 이란의 상황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근본적인 기본권 억압, 정치적 탄압과 검열은 여전히 심하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란에서도 자신의 문학 활동을 활발히 표출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그는 “내 소설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처럼 페르시아어로 번역된 후 이란에서부터 초청을 받아 여러 곳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언젠가 그의 새 작품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고 그가 모국인 이란으로부터 초청받아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로 강연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사진: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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