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 보스턴 ‘자유의 길’과 두 영웅

우리는 어릴 적부터 단군 신화를 배운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된’ 웅녀,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의 이야기는 내용만 따져보면 허구다. 그럼에도 단군 신화는 한반도 역사의 출발을 알리고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건국 신화로 평가된다. 호랑이와 곰이 서울올림픽과 평창올림픽의 마스코트 모델이 되는 것과 같이, 과거의 신화는 현대 문화에 자연스럽게 융화돼 전 세계인의 즐길 거리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 보스턴시는 건국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 활동했던 역사적 공간을 200년 넘게 보존해왔다. 기자는 명소들이 빨간 벽돌길로 연결된 ‘자유의 길’ 위에서 보스턴의 두 건국 영웅, 새뮤얼 애덤스와 폴 리비어를 만났다. 역사학계에선 그들과 관련된 영웅담이 사후에 만들어진 허구라고 밝혔다. 그러나 두 영웅의 신화는 여전히 미국인에게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으며, 미국 사회·문화에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보스턴은, 나아가 미국은 200년 전 사건에 참여한 두 영웅을 어떻게 기억하고 신화화하는지 현지에서 확인해보자.

새뮤얼 애덤스, 혁명가인가 보수정치인인가

자유의 길을 여는 첫 번째 명소는 1798년에 지어진 매사추세츠주 의사당이다. 주 의사당 안 복도에는 역대 주지사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네 번째 주지사였던 새뮤얼 애덤스의 초상화는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주 평의회실에 따로 보관돼 있었다. 기자가 그곳에 들어가려 하자 비서가 가로막았다. 여행 시작부터 초상화조차 감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존경받는 건국 영웅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뒤이어 방문한 올드 사우스 집회소의 전시에서도 “애덤스의 말이 (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의 신호가 됐다”며 애덤스를 미국 독립의 주역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1773년 12월 16일, 애덤스를 필두로 한 보스턴 시민들이 올드 사우스 집회소에 운집했다. 식민지를 통제하려는 영국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북미 식민지 사이의 갈등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1773년 5월 영국은 동인도 회사 차(茶)의 할인과 직접 거래를 보장하는 차 법을 제정했다. 식민지 시민들은 그것이 동인도 회사의 차 독점과 영국의 과세 권한 강화를 일으킬 것이라며 차 수입을 거부했다. 그러나 보스턴에는 영국군의 보호를 받아 차가 당도한 상태였으므로 당시 법에 따라 도착 20일이 지나면 세금이 자동으로 지급돼야 했다. 마침내 당시 주지사가 끝끝내 차 수송선의 본국 송환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집회소에 도달했다. 신화에 따르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애덤스의 말에 자극받은 시민들이 인디언 분장을 한 채 그리핀 부두에 있던 세 수송선에 뛰어올라 42톤에 달하는 차를 바닷물에 집어 던졌다. 차 사건에 분개한 영국이 북미의 자치권을 박탈하면서 미국 독립에 관한 논의가 처음으로 시작됐다. 신화가 맞다면 애덤스가 민중을 선동해 미국 독립 전쟁의 기폭제를 터뜨린 혁명가로 알려지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애덤스가 미화된 영웅이라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찻잎(Tea Leaves)』에 따르면 사건의 한 목격자는 “애덤스는 (밖에서 들리는 인디언의 고함이) 회의를 방해하려는 적들의 속임수라며 사람들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울부짖었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게다가 애덤스는 보스턴에서 발생한 일련의 갈등적 상황들이 식민 지배보다 “사악한 아메리카인들의 비열한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며 영국의 지배를 긍정하기도 했다. 또 그는 1786년에 보스턴의 가혹한 세금과 경제적 불평등에 분노한 ‘셰이스의 반란’이 일어나자 “공화국의 법에 반대해 폭동을 일으킨 자는 죽어 마땅하다”며 강경한 진압을 주장했고, 이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세 차례나 연임했다. 그는 혁명을 추동한 선동가라기보다 사회 질서를 우선시하는 보수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역사가 레이 라파엘은 『미국의 탄생』에서 “당시 영국 국왕이 임명한 피터 올리버 법원장과 토머스 허친슨 총독 권한대행은 보스턴에서 발생한 모든 반란 사건을 애덤스의 탓으로 돌렸다”고 애덤스가 신화가 된 이유를 설명했다. 19세기의 역사가인 조지 밴크로프트는 이들의 날조를 사실로 오판했고, 윌리엄 웰스는 밴크로프트의 설명을 믿고 애덤스의 첫 전기를 작성했다. 이처럼 여러 역사가와 작가가 정적의 날조를 역사적 증거로 잘못 인정함으로써 애덤스는 독립 혁명의 지도자로 미화됐다.

그럼에도 현지에서 애덤스는 혁명 선동에 능한 건국 영웅으로서의 평판을 견고히 유지하고 있었다. 자유의 길 근처 보스턴 차 사건 박물관에서는 18세기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미국 독립 전쟁에 관여한 주요 인물들의 배역을 맡아 연극을 상연했다. 연극에서 애덤스는 당시 영국 정부의 왕에게 공격적으로 항의하며 미국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대단한 정치가로 묘사되고 있었다. 어느덧 자유의 길 중반부에 다다르자, 오늘날까지 시민들의 집회와 정치인들의 선거 유세장으로 사용돼 ‘자유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패늘 홀이 나타났다. 그 앞에는 ‘청렴하고 대담한 정치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애덤스의 동상이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폴 리비어, 영웅인가 미화된 전령인가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식민지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철회하지 않은 영국의 고압적 태도는 북미의 결속과 영국에 대한 반발을 강화할 뿐이었다. 식민지 시민들은 영국군에 대항하기 위해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총기를 소유하기 시작했고, 식민지 내 법원과 의회를 공격하며 관련자의 하야를 강요했다. 반란과 폭동으로 가득 찬 북미를 견딜 수 없었던 영국은 마침내 반정부 세력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품 보급지 중 가장 컸던 보스턴 인근 콩코드 지역이 첫 타겟이 됐다.

1775년 4월 18일 밤, 영국의 내침 정보를 입수한 보스턴의 두 번째 영웅 폴 리비어는 영국군이 “땅으로 오면 한 개, 바다로 오면 두 개(One if by land, Two if by sea)”의 랜턴을 올드 노스 교회에 달아달라고 친구에게 요청했다. 교회에 두 개의 빛이 발하자, 혁명의 전령 리비어가 보스턴 인근 렉싱턴, 콩코드 그리고 미들섹스 지역의 모든 마을과 농장 사람들에게 영국의 침범을 알렸다고 신화는 전한다. 리비어의 질주 다음 날에 발발한 렉싱턴-콩코드 전투로 미국 독립 전쟁의 포문이 열렸고, 전 세계 역사를 바꾼 미국의 대승에 한 평민이 기여했다는 것이 리비어 신화의 요체다. 올드 노스 교회 앞에서 말을 탄 채 엄숙히 손을 뻗고 있는 리비어의 고동색 동상은 미국인들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한 건국 영웅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리비어가 실제로 전보에 참여하긴 했어도 신화 속 등장인물처럼 대단한 임무를 완수한 것은 아니었다. 랜턴은 영국군의 이동 경로를 강 건너편에 있던 독립군에게 알리기 위해 놓인 장치였다. 리비어는 영국군이 보스턴 인근에 다다른 시간에 맞춰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너 뒤늦게 말 위에 올라탔을 뿐이다. 게다가 리비어 외에 윌리엄 도스나 새뮤얼 프레스콧도 말을 타고 한밤중을 가로지르며 영국군의 당도를 시민들에게 알렸다. 무엇보다도 리비어는 중간에 영국군에게 붙잡혀 콩코드까지는 도착하지도 못했다. 실제 행동에 비해 리비어가 지나치게 미화됐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평가다.

1861년에 발표된 롱펠로의 시가 리비어 영웅화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보스턴을 여행하던 롱펠로가 지역에서 떠돌던 민담에서 모티브를 얻어, 남북 전쟁으로 혼란하던 시기에 개인의 행동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시를 썼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후일 『학생용 미국과 미국인의 역사』 같은 미국사 교과서는 리비어 신화를 사실인 양 소개하며 학생들에게 롱펠로의 시를 참고하라고 설명하기까지 했다. 역사에 기반을 두고 문학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문학에 기반을 두고 역사가 서술된 꼴이다. 라파엘은 “양심적인 작가는 역사를 토대로 허구를 만들지만, 이는 명백히 허구를 토대로 역사가 만들어진 경우”라고 비판했다.

살아생전 영웅이 잠시 거주했던 폴 리비어 하우스에서는 리비어가 가졌던 직업과 그가 사용한 도구, 19세기 집 양식을 전반적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리비어의 영웅화 과정이 전시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관람객들은 깨알 같은 글씨와 손으로 직접 경첩을 돌려야 볼 수 있었던 전시물 설명을 자세히 읽지는 않는 듯했다. 관람객 대부분은 리비어가 사용한 도구나 19세기 집 양식을 둘러보며 건국에 기여한 한 평민의 영웅적 행동에 감탄을 표했다. 미국인 관람객 A씨는 “미국 역사에 중심이 되는 역사적 인물을 알게 돼 기쁘다”며 “(그의) ‘한밤중의 질주’는 누구나 알지 않는가”라며 리비어를 추켜세웠다.

애덤스를 마시고 리비어를 맛보다

신화화된 두 영웅은 역사적 명소에만 박제돼 있지 않고 보스턴 현지에서 문화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양조 회사인 ‘보스턴 맥주 회사’의 설립자 짐 코치가 만든 첫 맥주의 이름이 바로 ‘새뮤얼 애덤스’다. 보스턴 시내 곳곳에서도 ‘새뮤얼 애덤스’라는 이름의 주점 간판(사진③)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올 시즌부터 세계적 명문 야구단인 ‘보스턴 레드삭스’ 팀은 새뮤얼 애덤스를 공식 맥주로 선정하기도 했다. 레드삭스 사장 샘 케네디는 현지 언론에서 “레드삭스와 샘 애덤스는 모두 보스턴 전통과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두 브랜드를 통해 보스턴을 대표하기 위해 협력하고 긴 파트너십을 맺는 것에 고무돼 있다”고 밝혔다.

폴 리비어의 문화적 활용도도 만만찮다. 리비어의 신화는 코카콜라와 웨스턴 일렉트릭의 광고, ‘리비어 설탕’이라는 회사 이름, 보스턴시 비콘 힐 지역의 ‘리비어 스트리트’까지 다방면에서 활발히 사용돼 왔다. 1991년 민주당 대선 후보 예비 경선에 참여한 폴 춍가스는 자신을 ‘경제 폴 리비어’라고 소개하며 선거 운동을 폈고, 2010년에는 ‘리비어 아메리카’라는 보수 정치 로비 단체가 설립되기도 했다. 기자는 ‘새뮤얼 애덤스’ 맥주와 ‘폴 리비어’ 샌드위치를 동시에 팔고 있는 보스턴 시내 ‘빈타운 펍’ 술집을 발견하기도 했다. 폴 리비어 하우스는 “리비어의 실제 행위가 무엇이었는지는 모호하나, 그가 영국군의 침입을 알리려고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며 문화적으로 활용되는 리비어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여정을 마치고 들른 ‘자유의 길’의 마지막 명소는 바로 도심 한복판의 공동묘지였다. 1660년에 만들어진 그래너리 공동묘지에는 흑인 노예와 백인 주인, 평민과 주지사, 빈자와 부자가 한 데 모여 5000여 명의 영혼이 쉬고 있다. 다른 묘비와 달리 장미꽃이 놓인 채 특이한 외관을 가진 묘비가 둘이 있었는데, 바로 폴 리비어와 새뮤얼 애덤스의 묘비였다. 과거의 영광, 역사, 계급을 넘어 모두를 포용하는 보스턴 중심가의 공동묘지는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종소리를 받으며 두 영웅의 영면을 추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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