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영화연구회 ‘얄라셩’ 평론 기고

독일 표현주의 영화 운동은 1920년대 일어나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주요 감독으로는 로베르트 비네,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프리츠 랑 등이 참여한 해당 운동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진 시기에 유행했다. 표현주의의 미학적 특징은 20세기 초기의 인상주의, 리얼리즘과 반대된다. 이런 모순은 실제 세계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주관적으로 심리적 세계를 표현하는 데서 비롯된다. 표현주의 운동은 영화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끝을 알렸다. 표현주의 감독들은 미장센, 내러티브, 카메라 움직임을 이용해 인간 내면의 무의식과 심리를 그렸다. 표현주의 영화는 미장셴을 통해 워낙 많은 것들을 표현하는 까닭에, 무대 디자이너인 헤르만 바름은 “영화는 그림을 소생시킨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1919년에서 1933년까지 독일 영화산업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의 분위기가 영화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굴욕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정치적·심리적 암흑기를 겪게 됐다. 바로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전쟁 때문에 동요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줬고 더 나아가 재창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은 영화가 가진 위력에 주목해 독일의 모습을 스크린 위에 창조하고자 했다. 1917년 정부는 회사를 세우고 여러 스튜디오들을 합병했다. 그렇게 우파(UFA, Universum-Film AG)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에리히 포머는 우파의 최고 제작자로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마지막 웃음〉(1924), 〈메트로폴리스〉(1927), <푸른 천사>(1930) 등을 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은 영화가 가진 위력에 주목해 당시 독일의 모습을 스크린에 시각화하고자 했다. 독일 표현주의의 황금기는 1919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부터 시작해 1933년 히틀러가 영화 산업에 개입할 때까지 이어졌다. 표현주의 영화가 가진 뚜렷한 특징들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됐다. 공포, 혐오, 불안, 사랑과 같은 감정에 주목했고, 기존 영화들과 다른 영화적 관습을 이용해 인간 내면의 감각을 묘사했다. 표현주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로테스크한 미장센을 구현했다: 뒤틀리고 과장된 스튜디오 세트, 무겁고 극적인 그림자, 극단적인 명암법(chiaroscuro), 범상치 않은 공간 배치, 기울어진 카메라 앵글, 역동적이고 주관적 ㅊ인 카메라 시선,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분장과 의상 그리고 양식화된 연기톤. 조명과 극단적인 명암법은 영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캐릭터의 심리적 상태를 그린다.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무시하고 터무니없는 명암법을 구사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무너진 것을 보여줬다. 독일 감독들은 카메라라는 창문을 통해 마음을 엿보았다. 카메라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주인공의 의식, 감정, 경험을 반영한다. 큰 제스처 등 과장된 연기톤은 연극 연기와 닮았다.

독일 영화의 발전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쳤다: 표현주의, 카머슈필레(Kammer-spiele), 신즉물주의(New Objectivity). 연극 연출가인 막스 라인하르트는 카머슈필레(‘챔버 극장’이란 뜻)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카머슈필레는 소규모의 관객과 출연진 사이의 심리적 교류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과 <마지막 웃음>의 작가 칼 마예어 또한 느와르와 카머슈필레 장르에 영향을 줬다. 1920년대 독일 영화들은 일종의 ‘실내극’이었다. 표현주의 영화 제작자들은 인위적인 풍경을 설계해 미장센의 작은 디테일까지도 통제했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 영화들은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과 <메트로폴리스>는 표현주의 단계에 제작돼 미장센이 크게 강조된 표현주의 영화의 전형이다. 카머슈필레 영화는 설명적인 자막을 거의 배제하고 배우, 조명, 세트 디자인 등을 통해 심리적 강렬함을 관객에게 전달했다.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1924)이 카머슈필레 영화의 예시다. 마지막 단계인 신즉물주의는 표현주의와 달리 객관성에 집중하고 하층민의 고된 삶을 비판적으로 다뤘다. <기쁨 없는 골목길>(1925), <사고(Accident)>(1929)가 신즉물주의 영화에 해당한다.

에리히 폼머 감독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이 표현주의 영화의 전형적인 예시다. 표현주의 영화는 세계를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으로 그리는 주관성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감각을 묘사했다. 중심 플롯은 공포, 살인, 미스테리, 판타지와 같은 주제를 주로 다룬다. 다른 표현주의 영화들처럼 미장센이 캐릭터의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회화적이고 기하학적인 세트는 삐딱한 창문, 뒤틀린 건물, 수직적이지 않은 문 등으로 이뤄진다. 그로테스크한 스튜디오를 통해 관객들에게 주인공 프란시스의 무의식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에서 프란시스의 병력이 밝혀지면서 관객들은 부자연스럽고 공포스러운 스튜디오가 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다. 완벽한 상황 통제를 통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전적으로 스튜디오에서 제작됐다. 게다가 조명의 사용은 회화적인 분위기에 극적이고 판타지적 요소를 더한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자연광이나 어떤 조명도 쓰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 영화의 전형을 벗어난다. 세트에 그림자를 그려넣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케사르의 거대한 그림자를 세트에 그려넣어 그의 초자연적인 힘을 묘사함으로써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심화했다. 이는 그림자를 이용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연구에 따른 캐릭터의 무의식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무의식의 위력에 대한 프로이트 연구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연구를 받아들여 무의식이 캐릭터를 예상치 못하게 파멸로 이끄는 위력을 탐구했다.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세뇌, 정체성 혼란, 공포감 등의 주요 양상을 볼 수 있다.

또한 혁신적인 카메라 움직임과 내러티브 등의 미장센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 영화는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작은 마을에 사는 미친 과학자 칼리가리 박사와 몽유병자이자 동료인 케사르에 대한 이야기다. 비네 감독은 전체 줄거리를 초반에 공개하고 한 청년의 입장에서 회상하는 내용으로 내러티브를 이어갔다. 회상을 이용한 내러티브는 이후 느와르 영화에 영향을 줬다. 관객은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청년을 믿게 되지만, 비네 감독은 그 청년이 정신병자이고 그의 정신과 의사가 마찬가지로 미친 칼리가리 박사임을 밝혀 결말을 비틀어버렸다. 또한 다른 캐릭터들 또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같은 병원 사람들이다. 비네 감독이 진실을 밝히고 나서야 관객은 모든 캐릭터들이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이상한 행동을 하도록 의도됐음을 깨닫는다. 이런 내러티브 구성을 통해 비네 감독은 타인에 대한 인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주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의 정신 상태를 돌아보기를 요구했다. 결말에서 밝혀지는 정신병으로 인해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정상인지 정신병을 앓고 있는지 확신을 할 수 없게 된다.

사회적 상황, 할리우드로의 인력 이탈, 스튜디오 제작에의 지나친 의존 등으로 독일 영화는 내리막에 접어들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모든 유대인 감독들은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나치는 우파를 독점적으로 선전 영화를 만드는 곳으로 전락시켰다. 나치의 패배 이후, 침체됐던 독일 영화 산업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마주했다. 독일 영화의 황금기는 다음 세기 할리우드의 주요 감독, 배우, 작가, 제작자들에 영향을 끼쳤다. 라인하르트, 브레히트, 프로인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할리우드 공포영화가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할리우드 영화 감독들 대부분이 독일 우파 출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표현주의 영화는 194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전세계적으로 느와르 영화 발전을 이끌었다.

| 글 |
구정은
고고미술사학과·18

| 번역 |
박소연
철학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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