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제주 4.3 사건 70주년, 상처는 치유될 수 있을까

지난 3일(화)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4.3평화공원을 찾은 것은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방문 이후 처음이다. ‘슬픔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내일로’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추모식엔 4.3 희생자 유족 등 1만 5,000여 명이 참석해 희생자를 기리는 추도곡 가사를 낭독하고,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가수 안치환이 작사·작곡한 민중가요인 ‘잠들지 않는 남도’를 합창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추념식에서 “4.3의 진실을 알려온 희생자·유족들에게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를 드린다”며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어 “4.3의 진실을 찾는 것은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이라며 “4.3의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주 4.3 사건 이후 지난 70년은 거대한 치유의 서사시이자 국가폭력에 의한 역사적 상흔을 씻는 길고도 험한 여정이었다.




4.3이 제주에 남긴 상흔, 학살과 레드 콤플렉스

1947년 3월 1일 제주시에선 3만여 명이 제28주년 3.1절 기념 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 도중 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치여 넘어진 데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발사했고, 이에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경찰은 비무장 시위대에 총을 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되려 시위지도부를 검거하는데 주력했다. 이에 도민들은 교사, 공무원, 상인 등 4만 명이 넘게 참여한 ‘민관 3.10 총파업’으로 대응했는데 이는 제주 전체 직장인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대적인 반발이었다. 이런 민심의 격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은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지휘부 대부분을 외부인으로 교체하고, 군정경찰과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도왔던 우익단체 서북청년단까지 파견해 1년 사이에 2,500여 명이 검거됐다. 1948년 3명의 청년이 경찰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자 제주 전반엔 미군정과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고조됐다.

그러던 중, 남로당 제주도당이 4월 3일 새벽 2시에 12개의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를 습격하는 무장봉기를 주도했다. 강원택 교수(정치외교학부)는 “좌익이 주도적으로 가담했다는 점에서 이념 분쟁으로 시작됐다”면서도 “미군정과 경찰의 무자비한 억압과 당시 제주도에 내재돼 있던 사회적 불안정이 긴장과 분노를 재생산하면서 4.3은 단순히 이념의 문제로 볼 수 없게 됐다”고 평가했다. 무장봉기 이후 공권력과 봉기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는데, 서북청년단의 방화와 약탈이 빈번했고 토벌대의 무차별적인 주민 학살, 한라산 중산간 지대 모든 부락이 초토화됐다. 이렇게 제주는 무수한 학살과 참상의 공간으로 주민들에게 깊은 역사의 상흔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랑쉬굴에서 벌어진 일방적 학살이다. 현재 동굴 입구는 콘크리트로 막혀 있는데, 발견 당시의 모습이 평화공원에 재현돼 있다. 1948년 12월 18일,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11명이 다랑쉬굴에 피신해있었다. 토벌대는 수류탄 등을 던지며 주민들이 굴 밖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나가도 죽임당할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거부했고 이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로 주민들을 질식사시켰다. 희생자 중에는 5살짜리 아이도 포함돼 있었다. 박명림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과)는 “다랑쉬굴 학살을 비롯해 토벌대가 저지른 대부분의 과잉 진압과 학살은 이념과는 무관한 사람들에게 행해졌다”며 “광기에 휩싸인 채 어린아이와 노인들에게까지 무차별적 학살이 자행됐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4.3 이후의 제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깊은 아픔을 겪었다. 우선 토벌대와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함께 공동체를 가꿔나가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했다. 성경륭 교수(한림대 사회학과)는 “당시 제주의 상황은 바로 옆집에 자신의 형제자매를 죽인 원수가 살고 있을 정도로 참혹했다”며 “4.3 이후의 마을 공동체는 통합하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론 ‘레드 콤플렉스’를 심하게 앓으면서 대내외적으로 4.3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릴 수밖에 없어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못했다. 박명림 교수는 “제주는 4.3을 겪으면서 소위 ‘빨갱이’라는 낙인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며 “특히 희생자 유족들에게 반공의식은 살기 위해 외쳐야 하는 맹목적인 구호로 기능했고 이런 트라우마는 4.3의 본질을 파헤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하다

4.3 사건 이후 70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책임소재를 특정해 추궁하기 어렵지만 다행히 김대중 정부 이후 현재까지 정부와 제주 지역사회는 4.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2000년엔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엔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가 채택됐다. 더불어 같은 해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찾아 국가 폭력에 희생된 유가족들 앞에서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는 등 정부와 지역사회가 함께 노력해왔다. 이 과정에서 2013년 8월 2일 제주4.3유족회와 제주도경우회가 ‘화해와 상생을 위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희생자와 토벌대의 후손으로 서로 대척점에 서서 첨예하게 대립해왔던 사람들이 조건 없는 화해와 협력을 약속했다. 이 선언 이후 두 단체는 여러 이념집단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4.3평화공원 합동참배, 제주 4.3 관련 행사 공동 참여 등 화해와 상생의 공동행보를 보여 왔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대선후보 시절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희생자 유족 신고를 상설적으로 받고 가족 품에 돌아가지 못한 유해를 국가가 유전자 감식을 지원해 가족 품에 안기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식에 12년 만에 대통령의 자격으로 참석한 문 대통령의 발언을 미뤄 보면 참여정부 시절의 4.3 정책을 계승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을 국가권력의 남용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됐다고 지적하며 4.3의 사후 처리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 4.3 사건 희생자의 배·보상 추진, 유해 발굴 및 유전자 감식 등 국가의 책임을 약속한 방침과 일맥상통한 대목이라는 평가다.

제도권 안팎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주 4.3의 꼬인 매듭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합의들이 이뤄지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산적해 있다. 성경륭 교수는 “고문과 연좌제로 인한 피해 규명, 마을 파괴에 대한 진상 규명, 미군정의 관여 정도에 관한 사실 확인과 책임에 대한 판단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특히 이런 작업에 기초해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지 고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강원택 교수는 “당시 미군정의 통치 하에서 벌어진 일이니 포괄적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도 “4.3의 본질은 반공이라는 미명 하에 이뤄졌던 민간인 학살이기 때문에 미군정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도 아예 책임을 떠넘기는 형태로 가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더불어 과도한 이념대립을 조장하는 정치권 내 발언들도 난점으로 지적된다. 강원택 교수는 “그동안의 4.3에 대한 평가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정당화돼왔다”며 “이젠 정치권 내에서도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4.3이 좌익에 의해 일어난 봉기로 촉발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4.3의 본질을 그 안에서 희생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로 보자는 것이다.

4.3평화공원 입구에 위치한 백비 앞 푯말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글이 적혀있다.




백비에 글을 새기려면

4.3평화공원 전시관에 들어가면 입구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비석이 누워있다. 그 아래 작은 푯말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글이 적혀있다. 4.3에 대한 성격 규정이 공식적으로 이뤄진 바 없기 때문이다. 4.3은 과거엔 ‘폭도들에 의한 반란’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80년대 이후엔 ‘항쟁’으로 불렸다. 현재 제주도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은 4.3 사건 70주년을 맞아 그 성격을 규정하는 ‘정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4.3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그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보듬고 치유하는 것과 맞닿아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여 정부 시절의 4.3 사건에 대한 대응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방침을 천명했지만 그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국회나 정부에서 논의된 바가 없다. 4.3특별법의 개정을 통해 미국에 책임을 묻자는 주장도 거세지만 당시 미군정의 지위에 대한 이견이 심하게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루 속히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된 국가의 폭력이 그 본질을 담은 이름과 함께 백비에 쓰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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