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주 강사
심리학과

‘공부를 하는 시간보다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이 더 어렵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한다.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무엇을 하고 있지 않은 순간’들, 성취와 의미가 부재한 순간들에도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우리의 성취가 사그라들었을 때, 눈에 보이던 것들이 사라졌을 때, 빽빽하게, 의미 있게 그 빈 시간을 메워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위한 도구이자 대상으로서 소모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마저 사라진 것처럼 두려워하고, 의미 없이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비난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 우울과 불안의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생명은 자기 안으로 철수해 자기를 돌아보고 다시 제련하며 그렇게 성장해간다. 그 성장은 눈에 보이는 크기일 수도, 보이지 않는 깊이일 수도 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자기 욕구와 가치에 따라 우리는 매 순간을 부단히 살아내고 있다.

우리를 매 순간에 존재 그대로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간을 나아가 생명을 존재로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사회 권력의 폭력적인 가치가 내면화된 것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성취와 효용만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준다는 집단 최면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자기 그대로 살아가기도 어렵고, 타인을 도구화하지 않기도 어렵다. 자기착취와 타인착취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 비틀어진 사회에서 자기 존재로 살아내려는 이들은 춥고 괴로운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충만한 봄에 다시 겨울나무를 추억한다. 겨울나무의 여백이 만들어내는 아련한 갈색빛의 침묵을 보려면 봄, 여름, 가을의 바쁜 결실과 수확의 시기를 지나 겨울이 돌아와야 한다. 잎을 다 떨구고 난 나무는 그제야 잎에 가려져 있던 자태를 풍요롭게 드러낸다.

겨울나무의 여백이 주는 울림처럼 절이 사라지고 남은 빈터인 폐사지(廢寺址)에 가면 그 빈 땅이 말 없는 위로를 건넨다. 빈 채로 있어도 괜찮다고, 보이는 것으로 나를 뒤덮지 않아도 존재하는 그대로 충분하다고…. 땅이 쉬어가고 나무가 쉬어가는 그 빈 곳에는 길고 나직한 호흡이 있었고, 소리 없는 울림이 가득했다. 빈 겨울나무를 멍하니 보고, 폐사지에서 하릴없이 머물다 내려올 때면 몸 안에 가득 침묵이 들어왔고, 그 침묵은 소요 속에서 나의 중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충전재가 됐다.

무의미도 부재도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오히려 더 풍요로운 의미와 깊숙한 존재를 담아내는 바탕이 된다. 그것이 가치 없다고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순간에 머물 수 있을 때, 그 안의 풍요로움은 우리를 더 크게 숨 쉬게 한다. 폐사지의 침묵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울림을 전하고 있는 것이며, 겨울나무는 빛깔이 없는 것이 아니라 외양이 아닌 뿌리 속에 양분을 저장하며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잎에 가려지지 않은 겨울나무는, 거창했던 사찰(寺刹)이 사라지고 난 후의 빈터는 더 자기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봄처럼 태동하는 우리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지금의 싱그러움은 겨울나무와 같았던 시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뿌리를 내려왔기 때문임을 알고, 또 앞으로 다가올 추운 시절에도 빈터가 주는 울림을 들으며 굳건히 견뎌내 주기를.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든 지금 그대로도 언제나 풍요롭고 아름답다는 것을 매 순간 잊지 않기를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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