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68혁명은 강압적인 기존 질서에 질문을 던졌고 그 물음표는 마침내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던 견고한 틀을 깨부쉈다. 68혁명을 이끈 젊은 층의 신좌파 세력은 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전체성과 권위에 도전하며 사회 주변부의 소외된 삶에 가치를 부여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이 살아갈 사회가 다양성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해 68혁명 50주기를 맞아 『대학신문』은 대학생들의 운동에서 시작돼 지금까지도 사회에 논쟁점을 던지고 있는 68혁명이 문화에 녹아든 방법과 이 혁명이 문화사적으로 갖는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세계를 뒤흔든 신좌파들의 상상력

68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프랑스 내부에선 억압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한정숙 교수(서양사학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부흥 속에서 자본주의가 호황을 맞았지만 지나친 물질적 안락과 관료주의를 추구하는 거대한 사회 구조에서 사람들의 삶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며 “이에 젊은 세대는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 경제적 구분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자각하고 다양한 층위의 불평등 구조에 대해 탐구하고 반발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68혁명은 프랑스 낭테르 대학의 학장이 시위를 위해 대학을 점거했던 학생 8명을 징계하고자 그들에게 징계위원회에 출석할 것을 협박하면서 시작된다. 학생들이 이를 거부하자 경찰은 폭력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고, 이 무력 진압으로 인해 시민들이 다치고 체포되는 것을 본 노동자를 포함한 다수의 국민들이 광장으로 나오면서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마침내 국민투표로 드골 정권이 퇴진하게 됐지만 드골 정권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조르주 퐁피두가 집권함으로써 결국 신좌파 세력은 정권 획득에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등장한 신좌파의 정신은 68혁명을 단순히 정치적인 혁명이 아닌 문화적 혁명으로 발돋움하게 했다. 기존의 구좌파와는 달리 소외된 개인의 삶을 구체화하기 위해 억압과 착취의 개념을 더 넓게 해석해 문화적 착취, 관료적 억압, 성적 불평등, 인종차별까지 모두 비판했기 때문이다. 정대성 강사(부산대학교 사학과)는 “다른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우후죽순으로 등장해 낡은 생활방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며 “68혁명은 문화와 정치가 만나고 일상 속에서 정치의 의미를 새로이 일깨우는 일상의 혁명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 해방과 집단적 해방을 동시에 겨냥한 저항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거리로 나온 신좌파의 정신은 주변 유럽 국가들과 미국, 일본까지 확산돼 전 세계에서 반체제, 반문화 운동이 진행됐다.




혁명과 민중의 징검다리가 된 문화

68혁명 당시를 살아간 예술가들은 현실에서 벗어난 예술을 현실로 복귀시켜 시대의 문제를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고민하려 했다. 이는 부르주아 관념 속에 매몰돼 있던 당대의 문화계를 각성시키고 그들이 문화적으로 소외된 서민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

◇하위문화도 문화다=프랑스 문화 정책은 ‘문화의 민주화’(democratisation de la culture)에서 ‘문화 민주주의’(democratie culturelle)로 변화했다. ‘프랑스문화예술학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문시연 교수(숙명여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는 “문화의 민주화는 ‘모든 사람의 문화’(culture of everybody)를 표방하지만, 문화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 의한 문화’(culture by everybody)에 집중한다”고 설명했다. 문화의 민주화 정책은 고급문화에 해당하는 오페라, 발레, 연극,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이에 입각한 문화 정책은 고급예술이 주로 생산·소비되는 기존 대형예술기관을 중심으로 삼고, 관객보다 예술가, 아마추어보다 전문예술가 중심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68혁명을 계기로 신좌파는 그동안 추진된 엘리트 중심주의인 문화의 민주화 정책을 비판하며, 문화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사회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문화 민주주의는 하위문화가 피어날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또한 문화 민주주의는 기성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서 파격적인 형식과 내용을 추구한다. 대표적으로 ‘민중공방’에선 당대 학생과 노동자들의 저항정신을 반영해 사회에서 금기시된 선정적이고 유희적인 이미지의 포스터를 제작하며 혁명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했다. 또한 ‘빌뢰르반 강령’은 국가 주도의 고급문화 정책에 반대하며 공공의 이익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을 문화의 중심으로 삼기도 했다. 김지혜 교수(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는 “민중공방이나 빌뢰르반 강령과 같이 예술가들은 예술·문화 권력의 독점과 그로 인한 개인 및 집단의 창조성의 경직화, 고급문화의 대중화로 인한 예술작품들의 위계와 사회계층들 간의 격차의 심화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를 다방면으로 전개했다”며 “문화 민주주의는 작가, 작품, 관객을 하나로 이어주는 동시에 관객들 상호 간에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장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예술에 정치를 더하다=68혁명을 주도한 신좌파의 목표는 모든 형태의 억압, 지배, 소외로부터의 급진적인 인간해방이었다. 이때 탄생한 정치 예술은 68혁명이 기존 질서와 체제의 전복을 꿈꾸며 제기한 문제점을 주제로 삼아 당시 정치·사회적 혁ㅁ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저항적인 작품들에 의해 실천됐다.

정치화된 예술은 관객-대중의 의식을 각성시키며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상생활에서의 혁명적 변혁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낸 68 예술은 대중에게 비판적 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를 통해 의식화된 사람들은 68 예술의 적극적인 지지기반이 돼 68정신이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했다. 정치 예술의 대표적인 단체 ‘프랑스영화삼부회’의 경우 학생, 노동자들과 연대해 학생운동과 같은 시대적 사건들을 촬영하며 혁명을 위한 영화를 제작해 보급했다. 김지혜 교수는 “전통적인 가치관, 도덕관념, 금기를 전복하기 위한 도발 행위와 규칙 파괴, 과학적 합리성으로부터 감수성의 해방, 자본과 현실원칙에 의해 정복당하고 억압돼 있던 상상력, 욕망, 쾌락의 활성화 등은 신좌파의 문화 혁명적 요소들이자 저항의 미학적 원리였다”며 “이 모든 요소와 이념을 예술적으로 반영해낸 것이 바로 68 예술이며 우리는 이를 68 예술의 정치성라고 일컫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문화 민주주의와 예술의 정치화를 겪으면서 미에 대한 주관성과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 확산됐다. 또한 일상의 정치화를 꿈꾼 68혁명의 기조와 맞물려 전 세계 예술에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녹아들기 시작했고 다양한 하위문화가 탄생했다.

◇‘어른들’에 대항하다=이재원 교수(연세대 사학과)는 “196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피해 복구와 경제 재건 시기를 거친 후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대중 소비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라며 “참혹한 전쟁과 기성세대의 권위의식에 반감을 느낀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적인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갔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반권위주의 운동으로는 히피 운동이 있다. 동시대 물질만능주의와 어른, 부모들의 규격화된 삶에 환멸을 느낀 젊은이들의 심리적 갈등은 기성 질서나 가치관을 타파하려는 히피 운동으로 구체화됐다. 양효실 강사(미학과)는 “히피족은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이에 상응할 정신적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던 기성세대를 비판했다”며 “물질주의와 성공 지향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들만의 새로운 삶과 이상을 구현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도시가 아닌 전원, 노동과 생산이 아닌 게으름과 놀이를 지향하며 억압이 없는 자연스러운 삶을 실천했다.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긴 머리를 고수했으며 술이 달린 조끼와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히피 정신은 바다를 건너 미국 뉴욕주 북부 베델 근처 화이트 레이크의 한 농장에서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The Woodstock Music and Art Festival)을 통해 화려한 꽃을 피웠다. 당시 기성 언론과 정부가 해당 행사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음에도 사흘 동안 청년들은 한데 모여 음악과 마약을 즐기기도 했다.

굳어버린 세상에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움직임은 ‘펑크 록’(punk rock) 장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펑크’(punk)는 ‘타락한, 무가치한’이라는 뜻으로, 펑크 록은 사회 불만 세력들의 심리적 반발심과 분노를 대변한다. 또한 청년들은 상식과 통념을 전복하고 당연한 것들을 비틀어 희화화했으며 거칠고 아마추어적인 음악을 이어갔다. 영국의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는 이런 펑크 록 장르를 대표한다. 정대성 강사는 “펑크족의 기성 사회에 대한 태도는 섹스 피스톨즈의 음악에서 정점에 달했다”며 “섹스 피스톨즈는 무정부적 허무주의가 농후한 가사와 무대에서의 거친 매너, 보수적인 주류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짧은 기간에 유명해졌다”고 설명했다.

◇인종주의에 반대하다=레게음악을 통해 사람들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지배를 벗어났지만 자메이카 국민 대다수를 차지했던 흑인들의 비참한 삶은 독립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빈민굴도 성행했다. 이에 밥 말리와 같은 흑인들은 백인들의 지배를 벗어나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을 음악으로 표출하며 연대했다. 양효실 강사는 “1960년대 사회와 문화가 급변하면서 자메이카에서도 당시 흑인의 라스타파리아니즘을 담은 새로운 음악 장르인 레게가 탄생한다”며 “레게는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자메이카에서 흑인들의 토속적인 리듬과 미국의 리듬앤블루스가 결합한 새로운 음악”이라고 설명했다.

‘치카노 벽화 운동’도 같은 흐름 속에 위치해 있다. ‘치카노’(Chicano)란 1960년대 후반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뿌리’ 찾기 운동에 구호로 내건 단어다. 치카노라는 이름을 갖는 벽화 운동은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자기 정체성의 긍정과 정치적 자결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었다.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멜팅팟’(melting pot)이라는 문화적 다양함 속에서 벌어지는 인종적 문제에 대항했다. 치카노 벽화 운동의 대표작으로 공동 제작된 그래피티 ‘우리는 소수자가 아니다’(We are not a minority)(1978)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행인과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해당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벽화엔 치카노를 정식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앵글로 색슨 문화를 향해 정면 대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전보다 규모가 확장된 세계적 교류를 통해서 한 국가 안에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존재하게 됐지만, 한편으로 비서구권의 사회는 서구권에 의해 잠식됐다. 그로 인해 다른 인종 사이에서 우열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열등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차별의 대상이 됐다. 이에 사람들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성적 억압에 저항하다=퀴어에 대한 혐오와 무지가 가득한 사회에서 퀴어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는 제한돼 있었다. 하지만 뉴욕주는 형법을 근거로 술집과 같은 공공시설이 동성애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피난처로 삼은 곳은 마피아들이 운영하는 일부 술집에 불과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스톤월’(Stonewall)이었다. 하지만 1969년 6월 이곳에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치고 퀴어를 체포를 하는 과정에서 퀴어인들의 반항이 있었고, 이는 성해방 운동의 시초가 됐다. ‘스톤월 항쟁’에서 퀴어들은 하이힐을 신고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를 행진했다. 양효실 강사는 “이 항쟁을 통해 퀴어들은 자신의 소수자적 삶에 대해 정치의식을 갖게 됐다”며 “스톤월 항쟁은 퀴어가 기형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삶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의식을 통해 그들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여성 해방 운동 또한 68혁명의 주요 흐름 중 하나였다. 이은미 교수(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는 “당시 남성 중심의 권위적인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들을 구속하고 억압했으며 여성의 성은 남성의 것과는 달리 외설적인 것으로 간주됐다”며 “68의 영향으로 1970년대엔 피임약이 보급되고 낙태가 합법화됐으며 결혼을 거부하는 여성들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양 강사는 “1970년대는 백인 남성 엘리트의 회화, 조각과 같은 규범을 따르지 않으려는 급진적인 여성 작가들의 퍼포먼스, 영상과 같은 새로운 매체가 미술의 대안 형식으로 등장했다”며 “주디 시카고의 ‘생리 욕실’(Menstruation bathroom)(1972)과 여성주의자들의 공동창작 프로젝트였던 ‘디너파티’(Diner party)(1979)를 통해 사회의 주변부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그려졌던 여성의 정치 문화적인 권리를 찾으려는 시대 분위기를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50년간 이어진 68, 우리가 이어갈 혁명

◇68혁명이 남긴 아쉬움들=사회적 소수자에 속했던 이들에게 자유를 외치게 해준 68혁명이지만 그 속에서도 한계는 존재했다. 우선 68세대가 사회에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했다는 보수주의자들의 평가가 있다. 68세대가 사회적 관계와 공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최소화하고 사적인 영역만을 극대화했으며, 그들이 즐겼던 문화는 오히려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김지혜 교수는 “기존 문화에 저항하던 반문화의 하나인 히피와 마약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 파고들어 부작용을 낳고 80년대 이후 히피 문화가 사그라들자 히피 문화를 즐겼던 이들이 극단주의 기독교로 전향하기도 했다”며 “이에 대해 보수파들은 68운동은 무질서와 파괴가 난무한 끔찍한 악몽으로, 도덕과 권위, 국가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한 대학생들의 불장난으로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굳어가는 사회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68세대가 이후엔 결국 관성에 젖어 들게 됐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재원 교수는 “68혁명 당시 그토록 비판하고 공격했던 대상들의 모습을 68세대가 기성세대가 된 이후 그대로 답습해갔던 것을 ‘옷을 거꾸로 입었다’(changement de veste)고 한다”며 “68세대가 젊은 시절 열정적으로 외쳤던 그들의 이상을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포기하며 점차 보수화되고 자본화되는 모습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또한 양효실 강사는 “펑크 록 문화의 출발은 68혁명과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였지만 결국 이후엔 다른 문화와 같이 상업주의화 됐다”며 “기존의 신좌파적 상상력은 없어지고 결국 자본이 문화를 잠식해 자본주의에 반대했던 문화 운동이 다시 자본주의로 돌아간 꼴이 됐다”고 설명했다.

한켠에선 68혁명의 뒤를 이은 사회 문화적 운동이 그들이 그린 구체적 이상향을 실현해내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양 강사는 “특정 성에 대한 혐오와 인종, 계급에 대한 혐오 담론과 더불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게이와 이슬람인에 대한 비난 등 현재까지도 세계는 갈등 중”이라며 “68혁명이 다양한 문화의 존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 세계엔 다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많다”고 말했다. 이 교수 또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등의 68혁명 당시의 문구들이 암시하듯 지나치게 이상적인 운동들은 그 결실을 맺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지구 반대편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을까=신좌파의 문화가 서구와 다소 멀리 떨어진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나뉜다. 한정숙 교수는 “한국엔 강력한 군사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고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반공주의가 만연해 신좌파의 운동인 68혁명의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 일본과 같은 국가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인 문화 운동이 가능했지만,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던 한국엔 이 운동이 확산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제한된 범위지만 한국의 청년 문화가 68혁명이라는 세계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이재원 교수는 “당시 청년들이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를 즐기며 기존의 음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포크 음악을 향유했던 것은 68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며 “60년대 소비사회를 반영하는 젊은 층의 문화와 기존의 지배문화에 대한 비판적 대안 문화는 한국사회에도 전파되고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소외된 삶을 더욱 소외시켰던 이전의 사회에 반성할 계기를 마련해준 68혁명과 그 이후의 흐름에 한국도 결코 제외되지 않는다. 이어 정대성 강사는 “68혁명은 경제적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다양한 기준에 입각한 불평등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것”이라며 “68혁명은 우리가 여성, 동성애, 인종주의와 같은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 급진적인 변화의 포문을 열었고 한국도 그 흐름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68혁명은 하위문화를 통해 ‘정치’의 의미를 재규정하며 정치 활동의 폭을 일상에까지 포괄하고 각자의 자기 주도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꿈꿨다. 이재원 교수는 “68혁명은 단순히 기존의 지배문화에 대한 반대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항하면서 반문화, 대항문화, 대안 문화라 불리는 ‘카운터 컬쳐’(counter culture)라는 새로운 문화를 제시해 이전까지 당연시됐던 모든 영역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이끌어냈다”고 68혁명의 의의를 설명했다. 실제로 68혁명을 통해 문화의 대중화를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생겨났으며 여성과 소수자의 권익을 위한 제도들도 법제화됐다. 또한 학교와 가정, 직장 등에서 권위주의와 위계가 사라지고 보다 평등한 인간관계가 구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68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된 여성운동, 소수자 인권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은 여전히 오늘날의 시민사회 운동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제기됐던 쟁점들은 오늘날에까지 해결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인종 비하 발언, 성 관련 혐오 발언 등은 이를 반증한다. 한정숙 교수는 “현재 이뤄지고 있는 미투 운동 등도 68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며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일상적 차원에서의 평등을 지향한 당시 청년들의 생각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고 말했다. 68혁명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삽화: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레이아웃: 이문영 기자 dkxman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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