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전의 명치(明治), 현대 일본의 등불이 될 수 있을까
150년 전의 명치(明治), 현대 일본의 등불이 될 수 있을까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8.04.0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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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현대 일본 사회에서 메이지유신이 갖는 의미를 알아보다

19세기 후반까지 비서구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근대화라 알려진 메이지유신은 실질적 권력을 쥐고 있던 무가정권 에도 막부(1603~1867)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를 수립한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사회적 대변혁 과정이다. 메이지유신은 당시 조선의 갑신정변, 베트남의 동유(東留) 운동 등 아시아 각국이 벤치마킹하려 노력할 정도로 동아시아 사회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2018년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이해 일본에선 그 근원지인 지역을 중심으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아베 정권은 메이지유신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메이지유신이 일본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대학신문』에서는 메이지유신의 과정과 의의, 한계점을 짚어보고 그것이 현대 일본 사회에 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에도 막부가 무너지다

메이지유신은 에도 막부를 멸망시키고 근대국가를 수립한 사건이다. 따라서 메이지유신을 설명하려면 에도 막부의 상황 설명이 우선돼야 한다. 에도 막부는 막부 초기인 17세기 초부터 백여 년 넘게 쇄국 정책을 굳건히 유지해왔다. 그러나 1853년 미국 동인도함대의 페리 제독이 무력시위로 개국을 요구하자 막부의 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막부는 이 상황에 독단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조정과 각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조정과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개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막부 최고 실권자 이이 나오스케는 1858년 개국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고메이 천황의 칙허 없이 서구 열강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런 막부의 움직임에 반발해 천황을 높이고 외세를 배격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조슈 번(번: 에도 시대에 통상적으로 쓰인 행정단위)을 중심으로 격화됐다. 막부의 탄압으로 수많은 존왕양이파가 사형, 유배 등의 처벌을 받자 막부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존왕양이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정국은 혼란에 빠졌고, 조정과 뜻을 같이한 존왕양이파와 막부 사이의 의견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막부는 조정과 막부로 이원화된 정치구조를 하나로 합치는 ‘공무합체론’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고메이 천황은 “막부가 양이책을 포기한다면, 그때는 천황 자신이 양이를 위한 친정을 행하겠다”고 표명하며 막부의 양이시행을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막부는 1863년 5월 10일 이미 통상조약을 맺은 서양 각국까지도 배척하는 양이를 시행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막부는 실제로 양이를 시행할 계획이 없었다. 이에 존왕양이파의 구심점에 있던 조슈 번이 단독적으로 양이를 시행하게 됐다. 이노우에 가쓰오 명예교수(일본 홋카이도대)는 『막말·유신』에서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미국 상선을 조슈 번 존왕파가 포격하여 양이를 실행했다”고 설명했다. 뒤이은 서양과의 전투는 결국 조슈 번의 패배로 끝났다. 이때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을 겪으며 서양식 신식 무기와 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는 공무합체파였던 사쓰마 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인 일행이 사쓰마 번의 최고 권력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츠의 행렬에 길을 양보하지 않아 호위무사가 영국인 일행을 해코지한 사건이 계기였다. 사쓰마 번이 영국이 요청한 가해자 인도를 거부하면서 사쓰에이 전쟁이 일어났다. 조슈 번과 마찬가지로 사쓰마 번도 패배했다. 양이의 불가능성을 확인하고 서로 같은 처지에 놓인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1866년 사카모도 료마의 중개로 삿쵸동맹을 맺게 됐다. 박진우 교수(숙명여대 일본학과)는 “동맹 이후 이뤄진 조슈정벌에 사쓰마는 가담하지 않았고 막부는 장군의 사망을 구실로 철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막부가 약화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이를 계기로 막부에게 정권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당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를 받아들여 천황에게 권력을넘겨주는 ‘대정봉환’을 하게 됐다. 결국 국가 통치 권력이 천황에게 돌아가면서 에도 막부는 무너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 메이지 정부가 수립됐다.

에도 막부는 정말로 무능했을까?

신 메이지 정부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은 쇄국정책을 펼치며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에도막부의 무능이 시대적 흐름을 빠르게 읽어낸 유능한 번에 의해 타파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에도 막부가 정말 ‘쇄국’정책을 펼치던 ‘무능’한 정부였다면 페리 제독이 개국을 요구했을 때 천황과 대부분 다이묘의 의견을 거부하면서까지 개국을 결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에도 막부가 개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위기의식’에 있다. 박훈 교수(동양사학과)는 “페리의 개국 요구 전부터도 위기의식이 계속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은 에조치(홋카이도, 사할린 일대)에 러시아인이 출몰하면서 시작됐다. 위기의식을 주장하는 이들은 소외된 일부 정치가나 재야의 지식인 등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박훈 교수는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서 “당시 발달해 있던 출판 시장을 배경으로 활발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고 이는 독서 대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며 위기의식을 주장하는 이들이 소수임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위기의식은 아편전쟁 후 급격히 대두됐다. 당시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청나라, 네덜란드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아편전쟁의 결과를 들은 에도 막부는 충격에 빠졌다. 박훈 교수는 “막부는 청나라가 패배했다고 인식했다”며 “이는 영국이 뒤이어 일본을 침략할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박훈 교수는 이를 “일본이 개항으로 가는 길의 가장 큰 걸림돌이 초기에 치워진 것”이라 표현했다. 이처럼 아편전쟁의 충격은 기존 쇄국론자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에도 막부가 교류를 통해 얻은 정보로 기존 쇄국론을 과감히 축소하고 개국을 시도했다면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쇄국’ ‘무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실제로 로널드 토비 교수(미국 일리노이대 역사학과)는 『일본 근세의 ‘쇄국’이라는 외교』에서 ‘쇄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17세기 초부터 막부가 취한 일련의 대외정책 문서엔 ‘쇄국’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게다가 에도 막부엔 나가사키 외에도 해외와 교류할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네 개의 창문’이라 불리는 쓰시마, 사쓰마, 마쓰마에, 나가사키는 각각 조선, 류큐 왕국, 에조 그리고 중국과 네덜란드와 통상하는 장소였다. 기존에 알려져 있던 쇄국의 모습과는 다른 양상이다. 박진우 교수는 “쇄국의 가장 큰 목적은 기독교 사상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지 서구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까지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미미했을지라도 막부는 나가사키를 통해 충분히 많은 정보를 끊임없이 얻고 있었다.

막부는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과 교류를 통해 얻은 정보로 개국을 비롯한 다양한 자기변혁을 할 수 있었다. 박훈 교수는 당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1867년 말 대정봉환까지 단행하자 많은 정치 세력이 막부의 리더십을 인정했다고 서술했다. 이 또한 막부의 ‘무능’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에 따라 막부토벌을 기치로 삿쵸동맹을 맺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 막부군이 군사적 도발을 일으키면서 전쟁이 일어나고 막부는 완전히 몰락하게 됐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은 막부가 무능하다는 기존 인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박진우 교수는 “막부의 대응이 ‘무능’이라는 고정관념은 메이지유신을 성공한 사쓰마와 조슈 세력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며 “막부는 나름대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했으며, 개혁정치를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이 근래의 연구에서도 밝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메이지유신을 향한 엇갈린 시각, 갈림길에 선 일본

학계에서 메이지유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일본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인 근대화로 평가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메이지유신의 주축이었던 가고시마현(구 사쓰마 번)에선 2013년부터 ‘메이지유신카운트다운’ 페이지를 개설해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크게 홍보하고 있다. 이외에 메이지유신의 주축이 된 야마구치현(구 조슈 번), 사가현 등에서도 메이지유신 주역의 자취를 돌아보는 관광 상품이나 공연 기획에 힘쓰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도 2018 신년사에서 “150년 전 선조들처럼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지에 (미래가) 달려있다”고 메이지유신을 언급한 이후 여러 연설에서도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말하며 강조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일본이 천황 중심의 전쟁 가능 국가로 회귀하도록 ‘제2의 메이지유신’을 계획하고 있다는 기사를 한국 언론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언론 보도에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메이지유신의 주축 점이었던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베 총리가 메이지유신이라는 큰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박진우 교수는 “일본의 보수정치는 ‘메이지 150년’을 ‘메이지의 영광’으로 미화해 국민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게 하는 이벤트로 이용할 것”이라 말했다. 남기정 교수(일본연구소)는 “메이지유신을 프로파간다처럼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면서도 “이런 움직임 하나로 일본 전체가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섣부른 판단을 경계했다. 메이지유신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중심이 돼 막부를 타도한 운동이다. 자연스레 막부 편에 섰던 나머지 번들은 메이지유신에 의해 주류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 교수는 “메이지유신에 의해 자신의 역사적 기원을 거부당했던 동북 출신자들은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리는 움직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일고 있다. 지난 1월, 자민당의 노다 세이코 총무성은 메이지유신을 되돌아봐도 다음의 일본은 그릴 수 없으며 “메이지 시대는 소수의 권력자가 국가를 지배하는 사회였다”고 비판했다.

가고시마현에서 만든 메이지유신 150주년 기념 로고들.

이처럼 메이지유신은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끈 사건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이에 반한 부정적 평가도 만만찮다. 박진우 교수는 “일본 내 진보파는 메이지유신 이후 성립한 국가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 절대주의 천황제 국가며 이로 인해 시민계급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억압했다고 보고 있다”며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이 메이지유신 후 근대국가로 성립한 것이 근린국가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지배의 출발점이 됐다고 비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훈 교수도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면서 사무라이 문화, 과장된 대외위기의식과 결합해 군부가 폭주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최근 이런 비판들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과오』 『삿초 사관의 정체』 『메이지 유신의 거짓말』 등 다양한 책으로 출판되고 있다. 하지만 현대 일본 사회가 메이지유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남기정 교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헤쳐 나갈 방안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복잡한 형태로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메이지유신에 대한 인식도 복잡하게 얽혀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10일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 남학생들이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아 촬영한 가고시마현 PR 동영상의 한 장면.

메이지유신이 100주년을 맞았던 1968년 일본 현지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박진우 교수는 “일본이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와 맞물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일본이 있다는 선전에 대부분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호응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소설은 일본 사회에 러일전쟁 승리를 비롯한 메이지 시대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지만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소설은 아니었다. 남기정 교수는 “이 소설은 메이지유신 이후 계속 발전하던 일본이 1905년을 기점으로 능력에 맞지 않는 국가운영으로 인해 하락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후 전쟁의 아픔을 딛고 고도성장을 이룩한 1968년의 일본도 잘못된 선택으로 하락할 수 있다는 경고다. 남 교수는 “앞으로 과거와 같은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한 국가운영을 하도록 경고하는 소설”이라 덧붙였다. 50년이 지난 2018년에도 일본은 많은 위기 속에서,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일본 내에서 메이지유신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비판, 재조명은 갈림길 앞에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불이 될 것이다.

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사진제공(상단): ‘가고시마시 메이지유신 150주년 카운트다운 사업’ 홈페이지

사진제공(하단): ‘세고동도 몰라!? 가고시마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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