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연 문화부장

『대학신문』 누리집엔 신문사 소속 사람들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만드는 사람들’ 코너가 있다. 그리고 기자단의 소개엔 각각 자신의 좌우명이나 『대학신문』 일원으로서의 다짐이 들어간다. 몇 번을 봐도 내겐 어색하기만 한 ‘황지연 문화부장’이라는 일곱 글자 아래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날의 페이지는 여전히 나를 흔들고”

이건 내가 지난 가을과 겨울에 거쳐 스무 번도 더 넘게 관람한 뮤지컬 ‘팬레터’의 캐치프레이즈다. 내가 이 작품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이유는 공연 속 대사인 “너의 말들로 그때 내가 버티었다”는 말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며, 그리고 들으며 지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며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게 뭐라고….’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사실 기사 작성은 단순히 ‘내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저 이해만을 따진다면 월급을 받고 신문에 크레딧을 싣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내 노동에 대한 계산을 마친 셈이다. 따라서 여기에 얹어지는 여러 사람의 마음은 내겐 갚지 못할 ‘잉여’일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수많은 타인으로 인해 삶이 바뀌어온 사람이었다는 걸 떠올리며 이런 일차원적인 교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가요 한 곡이 내 눈물을 그치게 했고, 시험을 망치고 본 뮤지컬 한 편이 내게 살아갈 이유가 돼줬고, 수험생활을 할 때 접했던 애니메이션 한 편이 내게 용기를 줬다. 누군가가 생계를 위해 했던 일이 누군가에겐 생애의 버팀목이 되는 순간이다.

김태형 연출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힘들게 만들어 올린 공연에 담긴 메시지가 온전히 관객에게 전해졌을 때, 그리고 그 피드백을 받을 때 ‘인간이 이걸 위해 사는 건 아닐까’ 하며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던 것을 종종 되뇐다. 아마도 신문을 만드는 일 또한 비슷할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열여섯 페이지, 가끔은 스무 페이지의 종잇장이 가진 메시지가 절실한 누군가에게 닿을 때 나는 신문을 만드는 일에 한 번 더 신중을 기한다. 그래서 「문화」면이 해야 하는 일은 이 사회에 만연한 이야기를 알리고자 하는 간절한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건 여성일 수도, 장애인일 수도, 가난한 예술가일 수도, 정신 질환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흘러나오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이를 지면에 옮기는 것, 그것이 문화부장이 해야 할 일이다.

지난 방학, 수습기자들에게 “신문이 사실을 말하는 매체라면 문화는 진실을 담아낸 그릇이기에 문화부 기사는 진실을 말하는 그릇이어야 한다”고 문화부를 소개했었다. 문화부장으로서 발행할 신문 호수가 몇 개 남지 않았다. 한 호 한 호 신문을 발행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잠들지 않는 시대정신의 문화부장으로서 어떤 이의 삶의 한 페이지를 흔들기에 부끄럽지 않은 면을 펴내고 있는가?’ 타인의 목소리가 내 삶의 페이지에 들어왔던 순간처럼, 한 면의 신문이, 한 단의 기사가, 한 줄의 제목이 누군가를 흔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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