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은 스스로를 자랑스레 문학인의 도시라 칭한다. 과언은 아니다. 브람 스토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사무엘 베케트 등 무수히 많은 세계적 작가들이 더블린에서 나고 자랐다. 기자가 직접 방문한 더블린의 곳곳에서 이 문학적 성취를 진심으로 즐기며 작가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연히 들른 가게 곳곳에 작가들의 사진이 소품으로 배치돼 있었고, 곳곳에서 그들에 관한 기념품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나단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흔적을 자주 마주했다. 『대학신문』은 특히 이들에 주목하며 더블린의 문학을 소개하려 한다.

억압과 불행의 역사, 경계인으로서의 더블리너

아일랜드 문학의 근본을 짚어가다 보면, 아일랜드가 처했던 특수한 역사에 다다르게 된다. 아일랜드는 영국 국왕 헨리 2세의 노골적인 침략이 이어졌던 12세기부터 대략 800여 년을 억압의 역사 속에 놓여 있었다. 18세기를 기점으로 그 차별과 억압의 수준은 더욱 극심해졌는데, 경제적·정치적 압박은 물론 문화 전반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억압이 자행됐다. 더블린 방문 기간 중 만난 데렉 한드 교수(더블린 시티 유니버시티 영어영문학과)는 “아일랜드를 식민지라 부르는 것을 꺼려하는 시선들도 있지만 그 구조는 식민지의 그것과 비슷했다”며 “정치적, 종교적, 언어적 측면은 물론 토지 영토권 등의 경제적 측면에 있어서도 영국에 의한 억압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에일린 더글라스 교수(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영어영문학과) 역시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실제로 영국에 의한 통치가 이뤄졌다”고 말하며 “프로테스탄트로의 개종을 강요하고 영어를 가르치는 등의 상황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한편, 아일랜드의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전환을 불러온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으로 19세기 대기근을 빼놓을 수 없다. 그 결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아일랜드를 떠났고, 이로 인해 아일랜드 고유의 문화는 급격한 쇠락을 맞이하게 됐다. 데렉 교수는 “영국에 의한 부정적 상황과 대기근이라는 불행을 벗어나고자 아일랜드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화를 포기한 측면이 있다”며 “아일랜드어와 영어가 이전에는 비슷한 수준으로 통용됐다면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영어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고 말했다.

지배당한 국가로서의 억압, 대기근이라는 불행으로 인한 상처는 아일랜드의 문학가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들의 작품 곳곳에서 그 상처를 마주할 수 있다. 이는 더블린을 주 무대로 직접적으로 펼쳐지기도 하며 주인공이 스스로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으로 설정하는 작품 속에서 간접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에 관한 그들의 고민은 그 혼란상 너머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도전으로 이어졌다. 또 하나의 문학적 전환, 문학적 저항이 일어난 셈이다.

노예로 선 인간, 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

조나단 스위프트는 더블린 성 패트릭 성당의 주임 사제로 말년을 보냈다. 성당에서 그의 묘지를 찾아볼 수 있다.

어릴 적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며 거인국이나 소인국의 모습을 상상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얼핏 동화 같은 모습을 띠고 있지만, 단순히 재미있는 동화로 소비하기에 『걸리버 여행기』는 훨씬 복잡한 텍스트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걸리버가 표류했던 왕국 중 어느 한 곳에서도 그는 주체로 서지 못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존재’ 또는 ‘이상한 존재’로 취급되며 타자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는 걸리버가 더 강자일 것으로 추측되는 소인국에서마저 걸리버에겐 숱한 차별이 자행된다. 여왕의 거처에 난 큰불을 소변으로 진압했다는 이유로 대역 죄인이 되고, 그를 죽이자거나 전쟁에 도움은 될 테니 눈만 멀게 하자는 논의가 이뤄지는 모습은 섬뜩함마저 안긴다.

데렉 한드 교수는 특히 걸리버가 말의 나라에 표류한 이야기를 담은 4장을 이런 문제의식이 극명히 표출된 대목으로 꼬집었다. 그는 “아무리 큰 차이가 있다고 해도 걸리버가 마주했던 다른 왕국의 사람들은 결국 사람들이었다”며 “사람 같은 말인 휴이넘과 짐승 같은 사람인 야후는 명시적인 의미 이상의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내포한다”고 설명했다. 앞선 왕국에서도 걸리버에 대한 극도의 타자화가 이뤄졌지만, 휴이넘과 야후의 구도는 보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의 위치에 말을 세우고 사람을 야만적인 노예로 그림으로써 단순히 권력의 편성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본질적인 고민으로까지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불운의 천재’로 설명되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생애와도 연결된다. 물론 영국에서의 활발한 정치 인생이나 아일랜드 성 패트릭 성당 주임 사제로서의 명예로운 말년을 통해 알 수 있듯, 그의 삶을 실패로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면, 이는 영국에서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아일랜드에선 영국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어느 곳에서도 완벽한 주체로 서지 못한 그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그의 묘비가 안치된 성 패트릭 성당에서도 스위프트를 “영국에서의 직책을 더 선호했음에도 아일랜드인에 대한 사회적 부정의에 적극적으로 항거한 인물”로 평하는 한편으로 “말년의 병마로 극도의 신경 쇠약을 겪으며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했다”고 설명하는 안내문을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가 작품이 된 문제적 셀러브리티

트리니티 칼리지 근처의 공원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채색된 동상을 만날 수 있다. 트리니티 칼리지는 그의 모교로도 유명하다.

트리니티 컬리지 더블린 근처에 위치한 메리온 스퀘어 파크로 향하면 누구나 쉬이 한 작가의 동상을 마주할 수 있다. 눈에 띄는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고 큰 바위에 걸터앉은 동상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은 거만하다는 인상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이 화려함과 거만함은 어쩌면 동상의 주인공을 표현하는 가장 적확한 개성일지도 모르겠다. 아일랜드가 낳은 문학적 거장이자 문제적 셀러브리티, 바로 오스카 와일드다.

사실 그의 생애와 문학적 성취를 식민지로서의 풍파를 겪은 아일랜드 역사와 직접적으로 결부시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유복한 가정환경과 영국을 오가며 누려온 작가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반추하자면 그가 아일랜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작품을 섣불리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의 삶에 큰 위기를 불러온 것은 그의 성 정체성에 관련한 재판이었다. 그는 동성애를 사유로 재판에 회부돼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으며, 영국에서 추방돼 암담한 말년을 보냈다.

다만 그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여러 사회적 통념을 해체하고자 했음은 자명하다. 이 해체는 작품의 인물,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모두 허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도 이를 쉬이 확인할 수 있다. 젊음과 아름다움에 관한 통념을 허무는 것이 표면적인 주제로 보이지만 도리안 그레이의 행적에 관한 윤리적 판단을 어떻게 내릴 수 있는가, 작중에 은근히 드러나는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등 ‘해체’라는 관점에서 다뤄볼 수 있는 주제는 여러 가지다. 화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초상화란 소재는 예술가의 작가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데렉 한드 교수는 “큰 감정적 격동을 원하지만 그 갈망을 충족하지 못하는 도리안 그레이의 딜레마가 19세기 후반의 딜레마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며 “이 딜레마란 식민지화 프로젝트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제국의 원활한 건설을 위해 식민지 내부의 다양한 격동과 혼란을 잠재워야만 했고, 이 식민지화 프로젝트로 인해 무감각해진 사람들을 도리안 그레이와 같은 캐릭터가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자체가 작품이었다는 말은, 스스로가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도 꾸준히 작품 속에 자신을 투사하며 무감각의 시대에 꾸준한 파격을 전하는 그의 인생과 맞닿아 있다. 주목 받는 유명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언제나 퍼포밍하며 정체성을 늘 허무는 방식의 삶.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당대의 문제의식을 허물며 그의 작품들은 아일랜드 특유의 문학 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더러운 더블린

더블린의 중시지에 위치한 오 코넬 거리 근처에서 누구나 쉽게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을 찾을 수 있다.

더블린의 수많은 문학가들을 전부 뒤로 하고 딱 한 명의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그를 테마로 한 관광지를 여럿 찾을 수 있고, 심지어는 『율리시스』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날을 ‘블룸스 데이’란 이름의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더블린엔 꽤 큰 규모의 제임스 조이스 센터가 운영되고 있고, 이곳을 통해서 제임스 조이스의 삶을 추적하는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조이스가 그려낸 더블린의 모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더블린에 대한 조이스의 이미지는 특히 『더블린 사람들』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흩어진 단편집이면서도 그들 전체가 한 데 엮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기에 쉽게 해석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더블린에 대한 주요한 감각은 ‘마비’다. 첫 이야기인 「자매」에서부터 ‘마비’라는 단어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단편들 전반에 걸쳐 감정적으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무감각한 존재들을 보여준다.

이는 더블린 사람들의 억눌린 삶을 요약하는 말이다. 에일린 더글라스 교수는 “마비란 바뀔 수 없음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라며 “그들 모두 나름의 감정과 욕망을 가지지만 이를 표출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으로는 「작은 구름」의 주인공을 들 수 있다. 그는 시인이 되고자 하지만, 계속해서 ‘아일랜드인 다워야 함’을 강조할 뿐 시인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시를 쓰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꿈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가 욕망을 가짐을 설명하고 그가 친구에게 느끼는 질투심이나 가족에게 느끼는 분노는 그가 유정한 존재임을 드러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멈춘 존재일 뿐이다.

이는 더블린과 아일랜드의 당대 상황에 대한 조이스의 처절한 인식을 보여준다. 반식민지 상태의 아일랜드가 처한 상황을 절망적으로 인식하며 마지막 작품인 「죽은 이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 좌절의 상태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임스 조이스가 영원한 더블리너였음을 같이 생각해야 한다. 더글라스 교수는 “더블린에 너무 가까웠기에 멀어지고자 했던 사람”으로 조이스를 규정하며 “어쩌면 너무나도 사랑하는 공간이었기에 그 통찰의 끝이 죽음으로 가닿은 것은 일종의 모순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과연 『더블린 사람들』엔 더블린에 대한 그의 애증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의 사랑하는 더러운 더블린”과 같은.

문학이란 자주 치유의 공간으로 설명된다. 작가에겐 고통을 고백하는 공간으로, 독자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대입해 자연스런 치유의 해답을 찾는 공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간단하게 살펴본 더블린 작가들의 공통점을 찾자면, 억눌린 정체성의 문제를 스스로 격파하며 혁신을 일궈낸 경계인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화상을 대면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독자들을 비추는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의 고통을 마주하고 극복의 서사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도 치유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삽화: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레이아웃: 이문영 기자 dkxman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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