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행사 | 아시아태평양 법 포럼 시리즈 27: Business and Human Rights

한 다국적 기업이 태평양의 ‘보우건빌’이란 섬에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광산을 개발했다. 이 때문에 지역의 수질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지역 천연종인 ‘큰박쥐’가 멸종했다. 세계 유명 패션 브랜드들의 하청 업체인 방글라데시의 또 다른 기업은 직원들이 공장의 기둥에 금이 가고 있어 위험하다며 출근을 거부하자 출근하지 않으면 임금을 지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2013년 4월 23일 건물이 붕괴해 당시 작업 중이던 1,129명의 직원이 사망했다. 이들 기업의 행위는 국제법상 불법일까? 개발도상국에선 다국적 기업에 의한 인권 유린 문제가 빈번히 발생한다. 이는 현재 세계 국제법 학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이슈 중 하나다. 세계헌법학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데이비드 블릿츠 교수(남아공 요하네스버그대 법학과)는 지난 11일(수) 근대법학교육백주년 기념관(84동)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법 포럼 시리즈’ 27번째 강연에서 “이같은 사례는 현재의 국제법이 기업에 ‘기본권 준수 의무’(Fundamental rights obligation)를 간접적인 형태로 부여해 생기는 문제를 두드러지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저항의 역사가 낳은 기본권의 성격

다국적 기업의 인권 침해 사례에서 핵심은 현재 국제법에 의해 기본권을 직접 준수하도록 요구받는 주체가 대부분 국가나 정부에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블릿츠 교수는 “역사적으로 법은 국가 권력의 횡포에 맞서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서 발전해왔다”며 “이들은 국민의 기본권 실현을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만 국가가 행동하도록 제한을 두는 방식을 띤다”고 설명했다. 자연히 이 법체계에선 개인보단 국가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대부분의 현대 사법 국가에선 국가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용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블릿츠 교수는 “국가가 아니라 다른 강력한 개별적 행위자에 의해서도 기본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장을 완벽하게 독점한 기업이 직원들에게 이사의 허가 없인 해고에 대한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말라고 지시한 상황을 가정했다. 이때 직원들은 이직을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이런 지시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 블릿츠 교수는 “최근의 페이스북 정보 유출 사태, 많은 기업이 업무 중 트위터 사용을 금지하는 것 등이 기업에 의한 기본권 침해의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기본권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과 같은 근본적인 가치를 보호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법 제도의 핵심은 그 본질적인 가치를 얼마나 잘 보호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어떤 대상이 이런 권리와 가치를 위협한다면 국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국가와 마찬가지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블릿츠 교수는 “개인의 기본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행위자에 대해 기본권 준수 의무가 부과돼야 한다”며 “이런 논리에서 기본권 준수 의무가 기업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밝혔다.



기본권과 국제법의 어색한 공존

이처럼 기본권의 핵심 아이디어는 국가 이외의 대상에도 폭넓게 적용된다. 그러나 국제법 체계는 국가 중심의 시스템을 따르기 때문에 둘 사이엔 근본적인 긴장이 내재한다. 블릿츠 교수는 현 국제법 체계를 ‘간접 모형’(The Indirect Model)으로 설명했다. 전통적인 국가 기반 모형에선 기본권 준수의 의무는 국가만이 갖고 비국가 행위자는 제3자로 간주돼 인권에 관해 어떤 의무도 갖지 않는다. 대신에 개인은 국가가 사전에 설정해 놓은 법적 틀이나 규제 구조를 통해 간접적인 통제를 받게 된다.

그러나 블릿츠 교수는 해당 모형에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선 그는 “권리 보호의 목표가 가치의 실현을 보장하는 것이고 다수의 행위자가 그 권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단순하게 이들 모두에게 기본권을 준수할 의무를 부여하면 되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개별 국가가 규제의 틀을 따로 만들어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이다”고 말했다. 이 모형이 마치 국가를 의무의 창시자(originator)로 전제한다는 점도 문제다. 국가가 기본권을 창시했다면 국가는 처음에 재량적 판단에 따라 의무를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권은 일종의 자연권으로서 인권의 실현 자체에서 규범적 합법성을 지닌다. 따라서 의무의 창시자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블릿츠 교수는 개별 국가가 모두 완벽한 법체계를 만들 수 없다는 점도 한계로 꼽았다. 국가가 자의적으로 간접 통제 구조를 만들면 다국적 기업은 그 국가 중에서 규제의 틀이 가장 허술한 국가로 이동할 것이다. 블릿츠 교수는 이에 ‘바닥으로의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며 “이 현상은 많은 노동자에게 착취와 불행을 야기할 것이다”고 밝혔다.



기본권과 국제법의 상생을 위해

블릿츠 교수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의 기본권 준수 의무가 반영된 국제적 조약이 체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간접 모형의 대안으로서 ‘확장된 국가 모형’(Expanding the State Model)과 ‘다자간 직접 모형’(The Multi-agent Direct Model)을 검토했다. 전자는 기업을 포함한 강력한 사적 개체들을 모두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후자는 모든 독립체에 각기 정도가 다른 기본권 준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블릿츠 교수는 “확장된 국가 모형엔 공적 행위자와 사적 행위자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모든 것엔 공적인 속성과 사적인 속성이 혼재돼 있다. 기업의 경우 일정 부분 공익을 실현하기도 하지만 특정한 한 사람의 이익의 극대화라는 사적 목표를 갖는다는 점에서 국가와 완전히 동일시 될 수 없다. 블릿츠 교수는 “기업의 이런 사적 측면을 인지하지 못하고 기업을 완전한 공적 존재라고 주장하면 그 본질적 속성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며 해당 기업으로 도출될 수 있었던 사회적 이익도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다자간 직접 모형’이다. 그는 “이 모형에선 개인적 특성에 따라 개별 기업은 그 범위와 성격이 상이한 기본권 준수 의무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블릿츠 교수는 헌법 이론과 자연법 모형에서 국가의 역할을 설명하는 부분에 주목했다. 헌법은 권리의 특성을 ‘권리의 강도’ ‘잠재적 침해’ ‘집단적 성격’의 세 요소를 바탕으로 평가한다. 블릿츠 교수는 기업이 기본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평가할 때도 우선 이 세 요소를 바탕으로 권리의 영향을 평가하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이렇게 평가된 의무 가운데 ‘과잉조치 금지의 원칙’*을 고려할 때 가장 적절한 기본권 준수 의무의 범위를 결정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직원들의 SNS 사용을 금지하는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때 논의되는 기본권은 표현의 자유다. 우선 기업의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가치와 그 속에 내재된 정당화 과정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직원들이 업무 중에 SNS를 사용한다면 생산성이 나빠질 수 있으며, 특정 개인의 의견이 회사 전체의 의견으로 비춰져 회사의 명예가 실추될 위험성도 있다. 이에 기업은 과잉조치 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기본권 준수 의무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블릿츠 교수는 인권 준수 의무를 사업체에 보다 직접 적용하는 ‘다자간 직접 모형’이 반영된 새로운 국제 조약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경제성장만이 우선시돼 그간 방관했던 기업과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환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재로선그의 이론에는 조금 더 충실한 설명이 필요하다. 질의응답 시간엔 그의 이론이 실제 국제 협약에서 어떤 모습으로 반영될 것인지, 그 청사진에 대한 물음이 제기됐다. 이에 블릿츠 교수는 모형이 국내에서 점진적으로 적용된다면 이후 국제적으로 충분히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형을 국제 협약에 반영시킨 구체적인 예는 앞으로의 강연과 오는 6월 세계헌법대회에서 설명될 예정이다.

*바닥으로의 경쟁(Race to the bottom): 자국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정부(국가)가 앞장서서 규제의 벽을 낮추는 지나친 경쟁 상태

*과잉조치 금지의 원칙(Proportionality): 적합성(해당 조치가 목표를 달성하기에 적합한가), 필요성(권리에 더 적은 영향을 미치며 목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가), 균형(조치로 인한 이익이 조치가 없어 입는 피해와 비례하는가)의 세 기준을 바탕으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 제한 조치의 정당성을 평가한다는 원칙



사진: 신하정 기자 hshin15@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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