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숙 교수
서양사학과

햇빛이 제법 화사하던 3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경복궁역 부근에서 광화문 앞길을 거쳐 통인동 쪽으로 올라오는 시위대와 마주쳤다. 군복을 입고 검은 얼굴에 선글라스를 낀 60대 이상의 남성이 대부분이었지만 젊은이나 중년 남녀도 눈에 띄었다. 전직 대통령의 탄핵 일주년을 맞아 벌어진 항의시위였지만, 시위대의 주된 구호는 남북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초상을 내세우고서 한국정부를 격렬히 규탄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약속되고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원칙적 합의가 이뤄진 직후의 일이었다. 그들은 이 모든 합의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의 분노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헤아려보고자 다가오고 지나가는 ‘태극기 부대’를 한참 바라봤다.

남북관계가 화해 분위기로 나아가는 데 대해 보수 세력이 반발하는 것은 냉전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정치지형 속에서 그들 자신의 개별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20대를 비롯한 젊은 세대 또한 북한에 대한 반감이 크고 통일-평화 문제에 대해 냉담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전부터 그런 주장이 없진 않았으나, 결정적 계기는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그런 인식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는 분석도 뒤따르긴 했다. 보수 정권 아래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분명 심화되긴 했어도, 과연 젊은이들이 남북문제에서 ‘태극기 부대’ 세대와 유사한 인식을 가진다고 봐야 할까.

세대문제에 대한 학문적 논의의 초석을 놓은 카를 만하임은 세대란 역사-사회적으로 공통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독자적인 삶의 방식과 독자적인 자의식을 가진 연령집단을 말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는 큰 전제일 뿐, 동일한 경험을 겪은 집단 내에서도 분화가 이뤄진다. 또 세대별 인식이 고정불변의 실체인 것도 아니다. 태극기를 흔들며 “니들이 전쟁을 알아?”라고 외치는 분들도 사실 전쟁을 전혀 겪지 않았거나 아주 어린 시절에 경험하긴 했어도 이것이 본인의 기억엔 없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타인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전유한 다음 이를 다시 다른 타인에게 강요한다. 게다가 전쟁을 겪었다는 것이 전쟁 불사를 외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만큼 더욱더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집단도 얼마든지 있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자기 사회에 대한 인식에서 기성세대와 크게 다르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젊은 시절 자기 사회에 대해 깊은 사랑을 지녔어도 늘 그 속에 자기 자신이 후진적 독재국가 국민이라는 일종의 열패감을 안고 있었다. 반면 청년세대는 N포세대론을 낳은 현실 속에서 힘들어하는 면이 분명 있긴 하지만 적어도 비교문명론적 관점에선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민주공화국”이며 그들 스스로 이런민주화를 평화적 저항을 통해 이뤄냈다는 데 대한 자부심을 품고 있다.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이제 한반도 평화와 궁극적으로 통일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도 청년세대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함께 논의하고, 그 길에 동행할 순서가 된 것 같다. 이는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주는 길이되, 미답의 길이므로 한국인들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서독 관계도 국내외 환경과 선행 역사가 남북관계와는 다르므로, 참고는 될지언정 답습은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겐 인내심과 함께 새로운 상상력, 그리고 지혜가 요구된다. 젊은 세대가 광장에서의 평화를 통해 세상을 바꿔본 세대로서 이 평화 감수성을 확장해 한반도 평화,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주역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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