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권민주 기자

최근 지하철 벽면에 붙은 한 광고에는 서빙 도우미와 아이 돌보미 여성이 그려져 있다. ‘아줌마’ ‘저기요!’ 대신에 마땅한 호칭으로 이들을 불러주고, 인격체로 대우해달라는 게 그 골자다. 고강도 육체노동과 저임금이 쌍벽을 이루는 두 직업이 공익광고에서조차 아직도 여성의 이미지로 한정된 것은 씁쓸하지만, 어딜 가나 그 상당수(특히 후자)가 여성인 것은 부정하지 못할 현실이다. 대신 다른 의문이 든다. 어쩌다 서빙 도우미와 아이 돌보미가 광고에 나란히 있게 됐을까. 사회, 경제적 대우는 비슷할지언정 두 직업군은 근본적으로는 조금 다른 성격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가?

1983년 앨리 러셀 혹실드가 감정을 여러 관점에서 분석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이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으로 간주함을 이야기한 이후 지금, 그 많던 감정노동자들은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있다. 무인 주문대로 음식을 주문하고, 마트에서 무인 계산대로 계산하고, 스마트폰만 있으면 매표소를 거치지 않고 KTX를 타는 시대다. 예쁜 목소리와 미소는 없지만, 표준화된 친절 서비스가 저비용으로 제공된다. 한편 맞벌이 부부 증가와 고령화로 돌봄 노동 시장은 몸집을 불리고 있다. 요양 보호사의 예를 들면, 요양기관에서 보호사를 파견하고 국가가 비용의 85%를 지급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시행된 지 10년 만에 요양보호사 국가자격증 취득자는 150만 명이 넘었고, 요양기관은 1만 4,000개에 달한다.

시장의 덩치는 커졌는데, 그 내실을 보면 요양보호사는 여전히 을이다. 과도한 서비스 요구를 받거나 폭언, 성희롱에 노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최저임금이 1,060원 올랐지만, 보건복지부가 시간당 625원의 처우 개선비를 없애 그마저 유명무실해졌다. 요양비는 국비 지원이지만 기관 운영은 민간에 맡겨지면서, 최소한의 근무 질이 보장되지 않는 기관에 몸담은 요양보호사들은 잦은 이직과 퇴직으로 처우의 악순환에 불가항력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요양시설과 이용 어르신 수는 늘었지만, 돌봄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한 이해와 국가적 설계는 부실하다. 기관 설립을 허가제로 바꿔 엄격하게 심사하자는 내용의 법안이 재작년 발의됐으나 국회 계류 중이다.

한편 돌봄 노동은 정합성이 낮은 개별 서비스라는 점에서 미래 사회에서 당분간 사라지기 힘든 직업으로 꼽힌다. 물론 감정노동이 그랬듯 기계로 대체 가능한 영역도 있다. 이용자에 대한 진단, 개입 계획은 데이터나 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단순 노동 영역에는 기계의 손길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적극적 돌봄은 기계에만 맡길 수 없다. 이용자 만족 최대화를 위해 진단-계획-시행-평가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일에는, 수치화할 수 없는 이용자의 삶에 심리적, 물리적으로 함께 부대끼려는 진정성과 ‘능동적인’ 감정 교류가 수반된다. 더 나아가 사이클의 보완은 때때로 그렇게 숙련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직관적 판단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적 ‘돌봄’ 노동 시장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기엔 오래된 발등의 불이 뜨겁다. 돌봄 ‘노동’의 전반적 처우에 대한 정책적 무관심은 오래된 것이자 어찌 보면 예견된 것이다. 예로부터 돌봄 자체에는 수동성과 희생의 이미지가 입혀진 측면이 없지 않다. ‘살림이나 해’라며 폄하되다가도, 그 하찮던 가사는 때때로 아름다운 뒷바라지라는 훈장을 달았다. 욕구나 감정의 희생을 미덕으로 보는 시각과, 돌봄에는 굳이 지식이나 전문성 따위가 필요 없다는 하대와 한계 설정이 묘하게 공존한다. 가정이 아닌 사회적인 ‘돌봄’ 환경에서까지 감정을 희생 중인 돌보미가 서빙 도우미와 나란히 광고에 있던 연결고리를 조금 알 것 같다.

김빈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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