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진 사회부장

소년은 박근혜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전방은요?”를 물었다는 그를 나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 소년을 친구들은 놀려댔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 여겼고, 그의 당선을 위해선 국정원이 댓글 좀 달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었다.

소년이 배의 소식을 처음 접한 건 4년 전 오늘, 점심을 먹으러 간 급식실의 TV에서였다. 모두 구조될 것이란 막연한 기대에 처음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배에 소년이 아는 사람이 탄 것도 아니었지만 배에 탔던 수백 명의 학생들이 소년과 같은 나이였던지라 자꾸 마음이 쓰였다. 중간고사 기간이었지만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교과서보단 배의 소식뿐인 TV와 신문으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래서 소년은 중간고사가 끝난 날 바로 친구와 함께 안산 합동분향소에 다녀왔다.

소년은 박근혜가 가족을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유가족들과 같이 눈물을 흘려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배가 가라앉은 그 날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발견하기가 그리 힘듭니까?’라는 말부터 해경 해체밖에 기억나지 않는 진정성 없던 대국민 담화를 지켜보며 그에 대한 소년의 기대는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해 가을 그가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유가족들은 그를 만나고자 전날 밤부터 국회 앞에서 차디찬 바람을 맞아가며 노숙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유가족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웃으면서 지나쳤고, 소년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를 정말 좋아했지만 누구보다 증오하게 됐다. 열렬한 지지자에서 처절한 반대자가 됐다.

그러면서 소년은 조금씩, 그렇지만 많이 변했다. 어른들의 말이면 그런가보다 했던 소년은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TV에 나오는 수많은 부조리한 일들을 남의 일로만 치부했던 소년은 고통 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던 소년은 세상이 바뀌어야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소년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펀드매니저에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생이던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동창의 발인 날에도 울지 않을 만큼 눈물이 없던 소년이었지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간 부산 여행에서 소주를 두어 병 마시고는 광안대교 앞 바닷가에서 그 배가 생각나 삼십 분을 울만큼, 소년에겐 항상 그 배에 부채의식이 있었다. 때문에 소년은 대학에 와선 뭔가 하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외면받기 일쑤인 작은 신문이지만 학보사에 들어왔고, 작년엔 그 배에 탔던 아들을 잃은 엄마를 인터뷰해서 기사를 썼으며, 사회부장이 돼 칼럼까지 쓰게 됐다.

모두가 짐작할 수 있듯이 소년은 나다. 굳이 내 이야기를 3인칭으로 표현한 건 소년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인 동시에 많은 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다. 그날 이후 많은 이들의 삶은, 각자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그 이전과 분명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그래야했다. 분명 그날 이후의 대한민국은 그 이전과 달라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해경이 해체되는 따위의 변화는 있었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안전보다는 이익이, 생명보다는 돈이 우선됐다. 그날 이후 우리는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제천 스포츠센터에서, 그리고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곳에서 또 다른 세월호를 마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아직 ‘희생자’라고 부를 자신이 없다. 아직 바뀐 게 하나도 없는데, 과연 무엇을 위해 희생됐다고 할 수 있을지 대답할 수가 없어서다.

대한민국이 달라져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은 ‘희생’이었다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4년 전 오늘부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외쳤지만 아직도 공허한 그 다짐을 되새긴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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