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를 만나다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었다.

지난달 8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연구를 진행했던 김승섭 교수가 쌍용자동차 해고 10년을 맞아 끝장단식에 돌입한 김득중 지부장의 단식 현장을 찾았다. “모든 문제는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어요. 정리해고란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창구라는 점에서 쌍용자동차 문제는 최근 GM사태와도 연결지어 볼 지점이 있죠.” 이날 그는 일일단식에 참여해 김득중 지부장과 뜻을 같이 했다.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엔 한국전쟁의 영향을 받은 형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형은 참전 기억이라는 비교적 원인이 명료한 상흔에 허우적거리는 ‘병신’이고, 참전하지 않은 동생은 국가적·사회적 트라우마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환부의 정체조차 모른 채 고통스러워하는 ‘머저리’다. 이처럼 ‘병신’과 ‘머저리’는 전쟁이라는 하나의 국가적 트라우마가 ‘개인의 인생에 물고기의 몸에 비늘을 새기듯 상흔을 남기는’ 두 가지 유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단 전쟁뿐이겠는가. 국가적 재난, 사회적 차별, 정리해고 등 다양한 사회적 트라우마는 저마다 개인의 인생에 직·간접적으로 깊은 상흔을 남기곤 한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병신’과 ‘머저리’와 함께하며, 그들에게 남은 상흔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으로 진단하는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 이름도 생소한 ‘사회역학’ 분야의 선구자인 김승섭 교수(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다. 그의 연구는 직접 현장으로 나가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터뷰를 한 날에도 그는 어김없이 자신이 연구하던 사회적 약자들의 현장에 서 있었다. 경칩이 지났음에도 칼바람이 단식하던 노동자의 볼을 사정없이 에던 날,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시위 현장에서 김승섭 교수를 만났다.

거미줄에 걸린 ‘병신’과 ‘머저리’를 위해

“매체에 등장하는 의사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막연히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 의대에 진학했다”고 솔직하게 운을 뗀 김승섭 교수. 그가 보건학자의 길에 접어들기까지 연세대 의대 진학 후 투신했던 다양한 사회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본과 1학년 겨울방학, 김승섭 교수는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들이 모인 사무실에서 한 달 동안 자원 상근을 했다. 노동자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다 손에 들고 있던 기타를 넘기려 주위를 둘러봤는데, 열 손가락이 온전히 다 붙어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김승섭 교수는 사회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본과 2학년 때는 군 복무 대신 교도소에 임상의로 자원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본과 4학년 때 보스턴의 한 사회단체에서 진행한 인턴십 활동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임상의가 되는 대신 이론적인 연구를 지속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밝혔다.

유학길에 오른 김승섭 교수는 질병의 분자 유전학적 수준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에서 나아가 사회적인 보건연구를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학문이 바로 사회역학이었다. 사회역학은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에 구애받는 대신 간접적인 사회적 원인을 찾고, 이같은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보건을 증진할 근거를 마련하는 학문이다. 기존의 보건학이 ‘병신’이 발생하는 원인에 주로 초점을 맞췄다면, ‘머저리’가 발생하는 원인에도 주목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역학의 핵심은 ‘원인의 그물망’ 이론이다. 개인은 그물망에 얽힌 여러 원인으로 인해 질병을 겪게 된다. 이때 그 그물망을 만든 거미, 즉 ‘원인의 원인’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거미를 찾기 위해선 해당 그물망을 엮어낸 역사와 권력과 정치적 상황에 주목해야 하고, 질병의 사회적, 정치적 원인을 탐구해야 한다. 예컨대 데이비드 스터클러는 IMF 당시 동유럽에서 결핵 사망 환자가 급증가한 것을 두고 긴축을 요구하는 IMF 구제금융의 판단이 사회적인 불안감을 증대시켰고, 사망을 가속했다는 사실을 검증했다. “결핵균에 의한 감염, 그 앞에 있는 정치 구조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개인을 압박하고 트라우마를 부여하는 사회에도 질병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중요한 예죠.”

김승섭 교수는 선행 연구 자료가 풍부한 미국에 머무르는 대신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본래 꿈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회역학 분야가 생소했던 당시 한국에서 연구를 진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국내에서 연구를 진행할 당시 맞닥뜨린 사회적 편견에 대해 그는 “이미 예상했던 어려움이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감수했다”며 “오히려 가장 힘들었던 건 체력적 측면이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굳은 마음을 먹고 뛰어든 그는 국내 각종 현장에서 다양한 사회역학 연구를 진행했다. 선구적으로 진행했던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에선 이들에게 쏟아지는 왜곡된 시선에서 이들의 아픔이 기인한다는 점을 증명했고, 4·16 세월호 특조위 생존 학생 연구를 진행하는가 하면 전공의의 근무환경과 소방공무원의 인권상황을 실태 조사하기도 했다. 거대 기업에 맞서는 연구도 진행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 주목해 고용불안과 저성과자 해고의 함정을 살핀 사례와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소송에 참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데이터로 무장하고 거미를 수색하다

“분명 ‘당신은 왜 학자인데도 정치 얘기만 하냐’는 시선도 있겠죠.”라고 운을 뗀 그는 “하지만 인생이 얼마나 짧은데 정치적이지도 않은 얘기로 씨름해야 할까요?”라고 반문했다. 자원을 나누는 공동체에 관여하는 모든 연구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결국 삶의 중요한 문제는 정치를 담고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살면서 중요한 문제로 씨름하는 게 재밌지 않겠어요? 정치적인 것을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그 방법과 이야기하는 양식의 문제죠.”

그렇다면 김승섭 교수는 어떻게 정치 문제에 접근할까. 이는 그가 스스로 내세우는 ‘데이터로 무장한 채 링 위에 오르는 학자’라는 정체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 들기요? 보건학자는 현재 가용한 의료 서비스와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에게 주목해 이들의 건강을 증진해야 해요.” 그는 기본적으로 보건학은 인구집단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학문이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외로운 싸움이에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에 책임을 묻는 일이니까요.” 이를 위해 그는 합리적인 사고를 토대로 데이터를 모으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데이터가 없으면 피해자들의 고통에 사회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나아가 목소리를 높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승섭 교수가 온전히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 서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저는 학자로서 연구에 임해야 하고, 그 본분을 잊어선 안 돼요. 객관성을 유지하고 데이터를 모아 합리적으로 분석해야 하니까요.” 물론 대상화할 가능성에 대해선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배제될 경우 해당 목소리가 대상화될 수 있고, 이에 따라 도출해낸 해결책의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어요. 보건학은 응용학문이기 때문에 진리탐구보다는 연구실 밖으로 나와 현장에서 직접 대화하는 과정이 중요하죠.” 따라서 그의 연구 과정은 단순히 학술적인 과정이 아니라 설득, 섭외의 과정이다. “기다림의 자세를 바탕으로 피해자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연구 결과를 좌우합니다.” 세월호 트라우마 연구가 대표적인 예다. 언론의 공격적인 질문으로 인해 2차 트라우마를 겪던 학생들은 연구진의 접근을 경계했지만, 기다림 끝에 결국 진심 어린 목소리를 끌어낼 수 있었다.

실제로 연구실에선 예측조차 불가능했던 새로운 가설을 현장에서 세우게 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고객에게 거울을 보여주기 위해 서비스하는 내내 허리를 튼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디스크 유발 원인이 된다. “현장에서 발견한 각각의 정보가 데이터로 쌓이고, 원래 가설을 수정해 더욱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끌어낼 수 있게 해주죠.” 현장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모든 면면이 문제 해결에 다가가는 무기인 ‘데이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속박이었던 거미줄, 공명체가 되려면

김승섭 교수가 오늘도 ‘데이터로 무장한 채 링 위에 오르는’ 이유는 결국 사회적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동체 개념을 단순히 물리적인 형태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운을 뗀 그는 “개개인의 삶이 서로 만나 민주성을 확장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단어로서 공동체를 이해하면, 당연하게도 사회적 차별을 비롯한 모든 문제는 결국 공동체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픔의 원인이 사회에서 기인했다면 결국 사회와 이를 구성하는 공동체를 들여다보고, 이를 바꿔 나가는 것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속박으로 작용했던 거미줄을 공명체로 전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승섭 교수는 사회적인 인식 체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갈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 사회는 갈등의 연속이다. 개인은 살아온 역사와 환경이 각각 다르고, 또 동일한 환경에서 같은 상황을 겪을지라도 처지가 다르기 마련이다. “갈등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축소해나갈 방법을 고민하는 문화가 중요한 것 같아요.” 차별적인 시선 자체를 후진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방법이다. “차별적인 시선을 직접 언급하면서 비판하면 오히려 그런 시선이 재생산될 수도 있어요. 마치 ‘코끼리를 보지 마’라고 하면 오히려 코끼리에 이목이 쏠리는 것처럼요. 때론 더 근사한 대안을 들이미는 것으로 (그런 시선의)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인식 체제를 변화시키려면 사회적 차별에 대항하는 구성원 사이 연대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문제 당사자뿐만 아니라 문제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김승섭 교수가 시간을 쪼개 다양한 매체에 지속해서 글을 기고하는 이유다. “연구자의 위치에서 연구의 사회적인 위치가 잘 전달될 방법을 고민해요.” 그는 사람들은 ‘옳은 의견’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강조했다. “특정 연구 결과를 중심으로 두고 여기에 인간적인 경험과 대화들을 엮어요. 해당 연구를 보다 풍부하게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목표죠.” 이를 위해서 김승섭 교수는 글감을 한 달 이상 묵힌 후에 여러 차례 퇴고를 거친다.

하지만 그가 마냥 장밋빛 꿈만을 꾸는 것은 아니다. “제 글의 수명이 길 것이라고 믿진 않아요. 1970년대에 나왔던 수많은 좋은 글들이 지금 퇴색된 것처럼요. 이미 10대에겐 제 글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세대가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담담하게 말하는 김승섭 교수에게서 특성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한계를 받아들이고 체제 안에서 가능한 제도적 변화를 꾀해 보다 나은 삶을 꿈꾼다는 점이었다. “20대 초반엔 보다 급진적인 주장을 더 멋진 것으로 생각했어요. 예컨대 대학 등록금 무상 운동이 대학 대출금 이자 인하 운동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죠. 둘 다 중요한 건데 말이에요.” 그는 주장의 급진성과 합리성은 다른 이야기고, 합리성과 현실성은 또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다양한 카테고리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고민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급진적으로 나아갈 것이냐 또는 점진적으로 나아갈 것이냐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정작 중요한 건 ‘실제로 나아가고 있느냐’ 아니겠어요?”



사회역학자로서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추구하는 김승섭 교수의 신조는 연구를 넘어 그의 일상에도 적용되는 것이 분명했다. “모든 공동체, 그러니까 모든 인간 사이의 연결 관계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를 지지해줄 수 있는 관계가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 그는 연구를 소개할 때마다 자신과 함께한 학생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언급했다. “저는 정말 운 좋은 사람이에요. 똑똑한 친구들이 석박사로 들어와 줬거든요. 친구들 덕분에 즐겁게 공부하면서 좋은 성과도 얻었죠.” 자신의 공동체를 소중히 대하는 그의 태도를 증명하듯, 실제로 인터뷰 당일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학생들이 먼 길을 달려 평택 현장을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려대 최고의 강의자에게 수여하는 ‘석탑강의상’을 지난해 수상하기도 했다.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체제 안에서 현실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꿈꾸려 해요.” 얼마 전, 김승섭 교수가 헌신한 국내 최초의 트랜스젠더 건강연구 논문이 드디어 출간됐고, 그의 연구를 모은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 역시 최근 10쇄를 찍었다. 이는 모두 김승섭 교수와 그 제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현장에서 또 연구실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해 얻어낸 값진 성과들이다. 김승섭 교수는 오늘도 학자로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구를 하는 데 하루를 쏟고 있다. 그는 분명 아픔은 길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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