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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받지 못한 아픔을 노래하는 한 편의 시리뷰 | 극단 ‘고래’의 연극 ‘빨간시’를 통해 고통을 나누다

저승에서 수연의 유서를 읽던 동주가 수연의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동주의 침묵이 수연을 자살로 내몰았음을 잘 드러낸다.
사진제공: 극단 '고래'

지난달 20일 나루아트센터 소공연장에서 극단 ‘고래’의 연극 ‘빨간시’가 막을 올렸다. ‘빨간시’는 수차례 술 접대와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고(故) 장자연 사건을 통해 과거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본다. 다른 듯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이 두 사건을 교차해 각각의 비극을 조명한다.

‘빨간시’는 침묵 속에서 외면받은 채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품은 두 인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할미’와 자살한 여배우의 성 상납을 방관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기자 ‘동주’가 그 주인공이다. 할미는 치매로 인해 온전치 못한 정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위안부 피해자로 있던 그 시기의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는 그의 손자 동주에게 오늘이 수요일이 아닌지, 고향 청도엔 어떻게 가는지 물어보지만 자살한 여배우 ‘수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동주는 할미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서로 다른 상처를 갖고 있는 그들 사이엔 의미 없는 대화만 오간다.

극은 두 인물의 인생을 ‘저승’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하나로 엮어낸다. ‘사자’의 실수로 할미 대신 저승에 가게 된 동주는 수연의 유서를 읽으며 고뇌한다. 그에게 수연의 자살이 타인의 상처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계속 갈등하던 그는 저승의 ‘옥황’과 ‘염라’의 도움을 받아 한평생 이해하지 못했던 할미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동주는 할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 나섰다.

이승으로 돌아온 동주는 할미의 모습을 지켜보며 할미의 아픔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 극단 '고래'

“1928년에 청도에서 소작농의 셋째 딸로 태어났지예. 가난했지만 어무이 아버지하고 우리 6남매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습니더.”


그의 굴곡진 인생과 상반되게 덤덤한 어투로 이어진 할미의 독백은 공연장의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할미가 자신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스크린이 배경을 가득 메워 투박하게 이야기하는 할미의 감정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무대 장치를 통한 직접적인 재현 없이 할미의 상처를 말로 풀어내자 동주와 관객들은 할미의 기억을 따라갔다. 하얀 셔츠를 입고 산책하는 주인집 도련님을 숨어서 지켜 본 일, 도련님이 빨간 복사꽃을 건네준 일을 통해 비춰진 사춘기 시절의 할미는 여느 소녀와 다르지 않았다. 이 평범했던 소녀는 복사꽃을 손에 쥔 채로 일본군에 의해 만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성노예로 지내다 아이를 낳게 됐다.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았던 시절 할미가 받은 상처는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채 평생 동안 곪아만 갔다.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치유가 돼.” “치유되지 않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다른 이의 고통으로 흘러 다니게 돼.”


할미의 독백이 끝나고 이어진 ‘옥황’과 ‘염라’의 대화는 극의 주제 의식을 관통하며 사회 비판적인 성격을 나타냈다. 치매를 앓아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어만 들으면 발작을 일으키는 할미의 모습은 치유 받지 못한 그의 아픔을 잘 드러냈다. 이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겉모습만 바뀐 채 ‘수연’과 같은 신인 배우들의 또 다른 아픔으로 드러났다. 수연과 그 그림자로 나타나는 인물은 역동적인 몸짓으로 수연의 상처를 표현해냈다. 동주로 대변되는 방관자가 수연의 목을 조르며 수연의 자살은 사회가 방치한 죽음이라는 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고 장자연 사건 사이엔 50년이 넘는 간극이 존재하지만 연극 ‘빨간시’가 두 사건을 ‘치유 받지 못한 상처’로 엮어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도 이에 호응했다. 관객 유홍철 씨(29)는 “평소 위안부 문제가 오래된 일이라 멀게만 느껴졌는데 비교적 최근 일인 여배우 성 상납 사건을 통해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니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며 “극이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을 한 가지 주제 아래 함께 이야기해 그 의미를 더했다”고 말했다.


“두려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내 속에 뭐가 있는지 ……. 왜 꼭 살아야만 하죠?” “청도, 살아만 있시모 안 가겠나!”


빨간시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드러내고 사회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해와 용서의 경지까지 나아간다. 할미의 인생을 들여다본 동주는 현실의 공간인 이승으로 돌아와 할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동주는 실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이젠 아무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는 할미에게 말을 건넨다. 짧은 대화지만 처음으로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순간이다. 할미가 그간 가지 못했던 고향에 가겠다고 대답한 것은 동주로부터 자신의 삶을 이해받아 곪은 상처가 치유됐음을 보여준다. 한편 극은 현실로 돌아온 동주가 위안부 수요 집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저승에서의 경험은 할미와 동주 모두의 상처를 돌봐준 것이다.

연극 ‘빨간시’는 우리 주변의 사회문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2011년 수요 집회 1,000회를 맞아 처음 공연된 연극 ‘빨간시’는 위안부 문제와 장자연 사건을 넘어 최근에 일어난 미투 운동까지도 포괄한다. 극단 ‘고래’의 이해성 대표는 “최근 장자연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쉼터에 계시는 두 위안부 할머니의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며 “‘빨간시’는 두 사람의 이야기기 때문에 살아 계시는 동안 다시 공연하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고 올해 4월 극을 다시 무대에 올린 까닭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이 대표는 “수요 집회가 여성을 향한 대대적인 폭력을 공개적으로 고발한 국내 최초의 사건이라 생각한다”며 “미투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관객 이혜수 씨(52)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깊게 관심 가진 적이 없었는데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며 “또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성적으로 억압당하는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극은 돌고 돌아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폭력과 상처에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성적으로 유린당한 피해자는 분명 존재하지만 어느 누구도 가해자로서 뉘우치지 않아 치유 받지 못한 그들의 아픔을 기억해달라는 것이다. ‘빨간시’가 던지는 메시지에 관객들이 응답해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길 바란다.

정명은 기자  jeongme1659@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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