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 영국의 공공주택 정책, 무엇이 문제인가

봄날의 런던, 래티머 로드 역 부근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늘어진 이층집과 평온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잔잔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렌펠 타워까지 가는 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는 눈에 띄는 추모의 메시지들은 이곳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현장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지난해 영국을 뒤흔든 그렌펠 타워 화재 사고가 발생한 지도 1년이 다 돼 간다. 어째서 이들은 가장 안전해야 할 집 안에서 화마의 피해자가 돼야 했던 걸까. 그렌펠 타워 화재가 들춘 영국 공공주택 제도의 현주소를 『대학신문』이 알아봤다.



영국 사회를 돌아보게 한 끔찍한 불길이 치솟다

사고가 있은 후 현재 출입이 통제된 그렌펠 타워의 모습이다. 건물 앞에는 런던 지하철 표지판을 본뜬 간판과 함께 추모공간이 마련돼 있다. 그렌펠 타워 내부에서는 감식이 진행중이며, 이 작업이 끝나면 올해 말 쯤 추모관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그렌펠 타워 화재 사건은 지난해 6월 14일 새벽 1시경 런던 켄싱턴 앤 첼시 지구에서 24층짜리 아파트 그렌펠 타워가 4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전소한 사건이다. 해당 건물은 런던 시 소유의 공공임대주택이었으며 발화의 1차 원인은 4층에서 발생한 냉장고 폭발로 밝혀졌다. 사고로 총 71명이 사망했고 7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약 120가구가 피해를 입었다.

이 화재가 많은 영국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이유는 사고 자체가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진국인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벌어진 중진국형 인재였기 때문이다. 화재는 4층에서 처음 시작된 후 약 30분 만에 매우 빠른 속도로 꼭대기까지 번졌는데, 일반적으로 아파트에선 소방차만 제때 도착할 경우 화재가 발생한 층 또는 주변 층만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후 건물 내 안전 설비와 안전 지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점과 리모델링 과정에서 싸구려 외장재를 사용한 점 등 중진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요인들이 사고를 키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의 주 피해자들이 저소득층과 이민자들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렌펠 타워는 영국의 대표적인 부촌 중 하나인 켄싱턴 앤 첼시 지구에 위치해 있었지만 해당 건물 주변은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하위 10%에 드는 지역이었으며, 주 거주자들은 흑인, 여성, 무슬림들이었다. 게다가 사고 시간 역시 많은 이들이 자고 있을 새벽시간대였기 때문에 거주민들이 대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각에선 이 사건이 단순한 화재 사고가 아닌, 영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계급 간 양극화를 보여주며 사회에 경종을 울린 사고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기업 성장을 위한 규제 완화와 공공비 절감의 대가를 가난한 사람들이 치른 사건이라는 것이다. 헤이즐 던킨 교수(영국 뉴캐슬대 자유전공학부)는 “주거와 교육, 복지의 측면에서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의 차이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며 “그렌펠 타워 화재는 이와 같은 영국 계급사회의 현실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영국의 공공주택, 정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보금자리일까

그렌펠 타워 근처에 있는 ‘Wall of Justice’의 일부다. 그렌펠 타워 화재 이후 이 곳은 그렌펠 타워 화재에 관한 여러 집회 및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는 광장과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렌펠 타워 화재로 영국 공공주택 제도의 허점이 드러났다는 시각도 있다. 공공주택 제도는 저소득층의 주거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19세기 말에 처음 도입됐고 현재는 이민자가 거주하는 경우가 많으며 시의회가 관리를 맡는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크게 현 주택 관련 정책으로 인한 공공주택의 부족과 안전 관리 미비를 문제점으로 꼽는다.

현재 영국에선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마가렛 대처 정부의 주택 매입권(Right to Buy) 정책의 여파로 공공주택의 수가 입주 희망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해당 정책은 정부가 주택 시장에 최소한도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출발한 것으로, 당시 영국 보수당 정권은 이 정책을 실시하면 주택의 공급과 수요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면서 정부가 공공주택을 짓지 않고도 주택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주택 매입권 정책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공공주택 건설을 민간 건축업자들에게 맡겼으며 공공주택은 자유로운 거래가 가능한 상품이 됐고 많은 수의 공공주택이 개인에게 팔렸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개인 소유의 주택 수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민간 사업자들이 공공주택을 지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주택 부족 현상은 점점 심화됐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주택 매입권 정책과 내 집 마련을 활성화하기 위해 주택 융자 이자에서 발생하는 세금을 줄이는 방식으로 보조금을 지급했고 이 결과 고소득자들이 더 많은 집을 사면서 집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헤이즐 던킨 교수는 이에 대해 “대처 정부의 정책이 시행된 후 영국인들은 강박적으로 내 집 마련을 하려고 했다”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렇게 수가 부족한 공공주택마저도 제대로 된 정부의 관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인디펜던트」 지의 보도에 따르면 전체 공공주택의 7분의 1에 달하는 약 52만 5,000채가 주택 표준 규정(Decent Home Standard)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주택 표준 규정은 주택 거주 면적, 단열, 내부 시설 및 수리 상태 등 집이 살기에 적합한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거주자들에게 일정 수준의 거주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정이다. 또 이 공공주택 중 절반가량이 누전으로 인한 화재와 해충 감염, 범죄에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렌펠 타워 역시 관리에 빈틈이 있었다는 세입자들의 주장이 있고, 특히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스프링클러가 건물에 설치돼 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거주민들은 화재 발생 시 대피로가 하나뿐이고 보일러 관리가 미흡하며 화재경보기가 없다는 이유로 그렌펠 타워 관리 주체인 KCTMO(켄싱턴 앤 첼시 세입자 관리기구)에 건물 내 안전 시스템을 개선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지만 이는 묵살됐다. 그렌펠 타워 화재 발생 후 KCTMO는 주민들의 건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으나 “화재가 심화된 원인에 대해선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그렌펠 타워에 대해선 2년 반 전부터 건물 안전 개선 작업을 해오고 있던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렌펠 타워 화재를 악화시킨 주범으로 지목된 알루미늄 외장재는 고층 건물에선 사용이 제한된 가연성 소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970년대에 건설된 그렌펠 타워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리모델링을 거쳤는데, 그 과정에서 건물 외벽을 개선하기 위해 알루미늄 복합패널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 소재는 불이 한 번 붙으면 빠르게 타는 특징이 있어, 화재가 발생했을 때 불이 발화점에서 24층 꼭대기까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게다가 기존에는 주민 합의를 거쳐 내화인증을 받은 소재를 사용하기로 했으나, KCTMO와 켄싱턴 앤 첼시 시 의회가 이 결정을 무시하고 리모델링 비용 절감을 위해 외장재를 값싼 알루미늄 소재로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보수당 정권의 안전 규제 완화 정책과 그에 따른 관리 부실이 화를 불러 결국 저소득층에게 악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1999년 영국 하원 의회는 환경·교통·농림위원회가 발표한 「외장재를 통한 건물 내 화재 확산 가능성」 보고서를 채택해 상원에 올렸으나 당시 정부는 보고서 내용을 법률이나 공식 화재 규정에 반영하는데 소극적이었다. 또 2014년 브랜든 루이스 전 영국 주택장관은 모든 건설회사의 건설 과정 중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에 대해 “임대주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주택 화재 안전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며 사실상 주택 안전 관리를 민간의 책임으로 돌렸다. 제레미 코빈 노동당 당수는 작년 테레사 메이 총리와의 질의응답에서 그렌펠 타워 화재에 대해 “노동 계급에 대한 무시에서 비롯된 규제 완화와 부실 작업이 낳은 끔찍한 결과물”이라고 비판했다.


모두가 안전한 집에서 살 수 있는 ‘정의’를 위해

그렌펠 타워 주변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추모 공간의 일부다. 래티머 로드에는 이처럼 시민들의 참여로 만들어진 다수의 추모공간들이 있었다. 화재에 대한 진상규명을 외치는 메시지가 눈에 띈다.

그렌펠 타워 화재 사고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영국 시민들은 ‘Justice4Grenfell’(J4G)란 민간단체를 꾸려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의 주목적은 정부와 켄싱턴 시 의회, KCTMO 등 책임 주체를 상대로 화재에 대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것이다. 올해 2월부터는 각각 ‘사상자 71명’ ‘그런데 아무도 체포되지 않다니’ ‘대체 어째서?’라고 쓰인 새빨간 세 개의 광고판을 내걸어 화제가 됐다. 이처럼 화재가 드러낸 저소득층의 불안정한 주거 환경을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크다.

현재 정치권은 공공주택 제도를 보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테레사 메이 총리는 공식 서신에서 “알록 샤마 주택장관이 가능한 한 많은 공공주택 세입자를 만나 의견을 수렴할 것”이라며 정부가 공공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지난해 9월 맨체스터 보수당 회의 연설에서 “가용 주택에 연 20억 파운드를 더 투자할 예정이며, 정부가 다시 주택 건설 사업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 보좌관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한 해에 5,000채 정도를 지을 수 있는 금액으로, 주택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단순히 주택을 더 짓는 것만으로 지금의 문제가 해결되긴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세입자와 공공주택 관리 주체 간의 상호 합의를 통한 주택 관리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는 것이다. 케빈 걸리버 인간 도시 연구소 운영 이사는 “거주민의 의견이 주택 관리에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며 “현재 전체 공공주택의 3% 정도만이 이와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오늘도, 그리고 사고 1주기가 되는 다음 달에도 이곳엔 진실과 가난한 자들의 안전을 외치는 메시지가 이어질 것이다. 정부가 그들의 외침에 제대로 답을 하는 때가 오길 바란다.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니까.



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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