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환
물리·천문학부 석·박사통합과정

일본 오사카 대학에서 펴낸 책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방법』은 여러 학문의 다채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어떻게 하면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을 수 있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미학, 수학, 역사학, 인류학, 법학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나름대로 답을 제시한다. ‘도넛의 구멍’에서 도시 인구의 도넛화 현상을 떠올리거나, 법망의 구멍을 연상하거나, 도넛형 올리고당 분자처럼 연관된 소재를 이끌어내며 이야기를 확장하기도 한다. 원래 질문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엉뚱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풀어내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도넛을 둘러싼 고품격 ‘아무말 대잔치’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아쉽게도 천문학은 그 이야기 중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독특하게 생긴 ‘도넛 은하’ 같은 천체들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예를 들어 ‘호그 천체’(Hoag̓s Object)라고 불리는 고리형 은하는 푸른색의 젊은 별들이 중심부를 마치 도넛처럼 감싸고 있는 독특한 천체다. 천문학자들은 먼 과거에 두 은하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불안정한 도넛 모양의 구조가 생겨났다고 믿고 있다. 많은 은하가 충돌, 병합 등 여러 상호 작용을 겪으며 진화하는데, 도넛 모양 호그 천체는 그런 은하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우주에는 딱 잘라 분류하기 힘든 천체들이 많다. 흔히 은하를 늙은 별들로 구성된 타원은하와 나선팔 구조를 보이는 나선은하로 분류하지만, 도넛 은하는 따로 분류하기가 힘들다. 도넛 모양뿐만 아니라 해파리처럼 꼬리를 가진 은하도 있고, 콩처럼 별이 밀집된 은하도 있다. 성운이나 성단도 마찬가지다. 정말 제멋대로 생긴 성운들이 많고, 우리의 분류를 벗어나는 성단들도 많이 발견된다. 우리는 큰 틀에서 이들을 분류하지만, 그 분류 자체가 우주를 보는 시야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천문학의 역사는 인간의 분류와 지식 체계를 깨뜨리며 시야를 넓혀온 역사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생각하던 시절엔 하늘에 보이는 천체들을 해와 달, 별 정도로만 인식했을 것이다. 망원경이 발달하고 관측 기록이 쌓이면서 태양계와 행성, 위성, 소행성 등이 있음을 알게 됐다. 수많은 젊은 별들과 늙은 별들을 관측하여 매일 뜨고 지는 태양도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진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냥 뿌연 성운인 줄만 알았던 안드로메다은하가 실제로는 먼 거리에 있는 외부은하임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다양한 외부은하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우리가 멋대로 분류한 것들에 대한 천문학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오늘날 우주의 물질 대부분은 빛에도 반응하지 않는 ‘암흑물질’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한 은하의 암흑물질 비율은 낮아도 50% 이상이다. 그러나 지난 3월, 암흑물질의 비율이 거의 0%에 가까운 은하가 발견되어 뉴스 지면을 달궜다. 물론 그 결과와 다른 의견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이 또 한 번 우리의 지식 체계를 깨뜨려야 할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건 천문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학문 연구의 본질이다. 연구 결과를 내고, 그걸 남에게 보여주며 설명하는 활동이 당장 큰 압박감과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 본질을 기억하고 있다면 조금은 더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도넛의 구멍에서 출발한 ‘아무말’들이 두서없다기보단 꽤 매력적이고 풍성한 잔치라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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