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유경 책임전문위원
다양성위원회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여성혐오’는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됐고, 페미니즘 논의들이 재점화되고 있다. 올해 2월 한 여성 검사가 TV에 나와 8년 전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면서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나의 사건이 폭로될 때마다 언론이 사건을 보도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그것을 재해석하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성폭력 사건이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과정 그 자체가 우리 사회 성폭력 감수성의 수준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으며 지상파와 케이블 TV 등에서도 페미니즘 이슈들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제작·방영하고 있다. 이번 학기 강의를 맡은 학부 교양과목인 ‘페미니즘의 이해’도 어느 때보다 학생들의 관심이 뜨겁다. 수업시간에 질문이 많아졌고 수업이 끝나도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얼마 전 한 걸그룹 멤버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 논란’이 제기되는 기이한 현상도 목격되고 있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소통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페미니즘은 인간의 조건과 존엄성에 대해 질문하는 철학이자 정치적 실천’이라고 포문을 열면서 이번 학기는 보다 상기된 마음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페미니즘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할까. 또한 페미니즘을 가르치고 이야기하는 수업은 다른 수업과는 무엇이 달라야 할까. 페미니즘 수업에 대한 모범답안이 따로 없을뿐더러 오늘날 학생들의 학습 욕구에 충실한 여성학을 설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도전과제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한 친구들부터 처음 접하는 친구들, 그리고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친구들이 함께 교실에 앉아 있다. 하지만 현재 어떤 입장을 취하면서 앉아 있든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으로 수강신청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희망하건대 학생들의 인식과 경험을 수업시간에 다루는 기존 이론 및 개념들과 연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과 사회의 이슈를 젠더 관점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며,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참여형 수업이 효과적이다. 학생들은 이미 토론할 준비가 돼 있는 듯 보이지만 또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자율적인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고, 페미니즘의 발전도 그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행복한가’가 인생의 화두가 되고, 개인의 이해관계와 자신이 속한 가족이나 조직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면을 매일 맞닥뜨리고 있다. 또한 SNS로 과잉연결돼 있는 우리 개인들은 실질적인 관계 맺음에서 서툴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가족관계, 선생님과 학생, 동료 사이, 친구 사이, 연인 사이에 어떤 관계 맺음의 규칙이 필요한지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배우고 성찰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미투 운동을 통해 성폭력 사건이 알려질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공분하지만 정작 자기 삶의 궤적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성폭력을 포함해 조직 내에서 차별이나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문화를 관행이란 이름으로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도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페미니즘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는 실천적 학문으로서 관계 맺음에 대해 공부하고 성찰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원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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