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지난 2일(수), 대한민국 여권 디자인이 2020년에 교체된다는 뉴스가 유포되자, 소셜미디어엔 여러 의견이 제시됐다. 기존의 진한 녹색 여권이 촌스러워서 들고 다니기 창피했는데, 세련된 남색의 표지로 바뀌니 기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디자인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라는 사람도 있었다. 국장 디자인이 바뀌지 않는 한 세련된 디자인은 불가능하다는 섬세한 평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조선의 여권 표지색과 ‘통일’하는 것 아니냐는 재밌는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고, 어설프게 세련미를 추구하는 일은 촌스럽고, 오히려 구식 도안을 고수하는 쪽이 세련된 태도가 맞다는, 힙스터 특유의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었다.

미술과 디자인의 역사와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이런 공공적 디자인 상징체계의 변경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개인적으론 사실 이래도 무방하고 저래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나라 자체가 촌인데 왜 거짓 세련미를 바라는가’ ‘가짜 포장을 바라는 것도 부도덕의 일종이다’ ‘구 여권이 실상에 충실하므로 더 정직한 디자인이다’라는 의견 아닌 의견을 제시했는데,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다수였지만, 이를 다소 불쾌하게 받아들인 사람도 없진 않았다. 즉, 촌스러움을 한국인이나 한국 사회의 속성으로 긍정해버리는 일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

그렇다면, 촌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체화된 촌스러움은 노력으로 탈피할 수 있는 것일까? 사전은 ‘촌스럽다’를 “어울린 맛과 세련됨이 없이 어수룩한 데가 있다”고 정의한다. ‘조야하다’는 뜻으로 쓰인다면, “천하고 상스럽다”거나 “물건 따위가 거칠고 막되다”는 뜻일 테다. ‘촌티’라고 하면, “시골 사람의 세련되지 못하고 어수룩한 모양이나 태도”를 일컫는다.

하지만, 사전적 정의엔 뭔가 빠진 내용이 있다. 촌스러움이나 조야함을 결정짓는 위계에 대한 진실은 사전이 다루기 어렵다. 촌티나 촌스러움은 노력을 통해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더욱 그 흔적이 진하게 남는 특징이 있다. 하얀 그림에 어두운 색으로 덧칠을 하면, 그 부분은 지워내기 어렵듯이, 검은 그림에 밝은 색으로 붓질을 가하면 그 부분이 나머지 어두움을 결정짓게 되듯이, 촌티나 촌스러움은 완전히 지워낼 수 없다. 부정하려 애써도 흔적 기관처럼 명확하게 남는다.

그렇다고 촌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예술계에서 이름을 날린 이들 가운데 시골 출신 게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세련미를 향한 강한 열망으로 한 시대의 힙이나 스타일을 규정해낸 시골 출신 게이들을 보면, 촌스러운 문화적 배경을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자기 부정의 에너지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잊지 않고 결국엔 내 뿌리를 긍정하고야 말겠다는 자기 긍정의 에너지가 묘하게 충돌하며 마법적으로 상호 작용한 경우가 태반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장 콕토를 모방하며 뉴욕 예술계에서 인정을 갈구했던 청년 앤디 워홀이 되겠다. 워홀은 예술을 통한 계급 상승과 정체성 갱신을 원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조용히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봉사 활동에 참가하는 영원한 시골사람으로 남고자 했다.

개인 차원에서 촌스러움을 극복하는 서사는 그래도 일구기 쉬운 편이다. 정말로 어려운 쪽은 집단이나 공동체 차원의 극복 서사를 일구는 일이다. 세련미란 것은, 몇 백만 명 가운데 한두 명이 나머지를 아래로 줄줄이 위계적 구조로 세워놓을 때 구현되는 가치로서, 누구도 맨 꼭대기에 영원히 앉아 있을 수 없고, 또 각 위계는 다시 여러 위계들과 상호 작용하며 상징 자본을 물려받는 이들에게 세대 유전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브 생로랑 같은 패션 천재도 말년엔 촌스러워서 무시를 당했던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도 있다. 그의 시그니처나 다름없었던 1966년산 스모킹 룩은, 지금까지 누구도 재해석을 통해 원본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거꾸로 그 때문에 아직도 조금 촌스럽게 느껴진다.

하면, 조선미술사 연구에서 세련미와 촌스러움의 딜레마는 어떻게 다뤄졌을까? 1930년대의 식민 조선에서 조선미(술)론이 전개되며,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색이나 중국색으로부터 구별되는 조선색을 규정하려는 열망이 나타났던 적이 있다. 고유섭은 1940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글 “조선미술문화의 몇낱 성격”과 1941년 「춘추」에 기고한 글 “조선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 문제”에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고수한 작은 맛”과 같은 언어로 조선미술의 특질을 규정하고자 했더랬다. “구수한 큰 맛”과 “고수한 작은 맛”을, 전문가의 언어가 아닌 입말로 고쳐 풀어보면, 변방답게 세련미가 부족하고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꽤 호방하고/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데 정감까지 넘쳐서 썩 괜찮다는 뜻이 되겠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또한 쉽게 풀어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식민지 지식인이 하나, 현대인의 내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둘, 낯선(?) 타자로서의 조선의 예술을 재대면하고, 셋, 그것을 긍정하는 미학화 과정을 통해 자신을 구미나 일본의 지식인과는 다른 ‘현대 조선인’으로 업데이트하는 차이화 전략의 하나였다.

아무튼, 세련미와 촌스러움은 정태가 아니다. 그 둘은 위계로 엮인 유동적 가치 체계로서, 끝없이 밀고 당기며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기억하자, 세련미의 수명은 짧지만, 구수한 큰 맛은 영원하다.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1995~2000년 LGBTQ 운동가로 일했고, 현대미술가로서의 실험기를 보냈다. 세기말~세기초 잠시 큐레이터로 활동한 뒤 평론가로 이름을 얻었지만, 현재는 ‘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을 인생의 과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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