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곤 취재부장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고등학생 시절 ‘벼락치기’의 귀재였다. 잔머리는 핑핑 돌아가는 것에 비해 기억력이 원체 안 좋은 탓에, 시험 전날이면 밤을 꼬박 새워 머릿속에 시험에 나올 만한 것들을 몽땅 몰아넣고 학교로 향했다. 당연히 시험이 끝나면 곧장 곯아떨어졌고, 공부한 것들도 금세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대학에 입학해선 워낙 술을 달고 산 탓인지 며칠을 연거푸 밤새기가 버거워져 벼락치기는 그만뒀는데, 이번주로 막을 내리는 총장 선출 과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내 고등학생 때가 다시 떠올랐다. 서울대라는 학생이 총장 선출이라는 큰 시험을 앞두고 하루하루 벼락치기를 해나가고 있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때의 벼락치기 전문가로서 동류의 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지난해 11월, 총장 선출 방식을 정해야 하는 기한을 며칠 남겨두고서야 총장 선출 제도 개선안 논의를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공청회에 모인 다양한 구성원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총장 선출 방식에 대해 가지각색의 목소리를 냈지만, 시간 부족을 이유로 논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관련 사항은 모두 갑작스럽게 결정됐다.

이후엔 이런 자리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러 총장 후보자들이 많은 학내 문제를 해결해줄 만병통치약으로 학내 구성원과의 논의, 소통, 합의, 숙의를 제시했지만, 정작 총장 선출 과정 방식 하나하나는 비공개로 진행되는 총장추천위원회(총추위)의 의결에 따라 눈 깜짝할 새 결정됐다. 총추위가 내린 결정들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벼락치기를 해도 시험은 잘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 결정에 학내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고루 담길 기회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닐 것이다. 구성원들은 총추위가 결정한 것들을 메일로만 공지 받았고, 그나마도 처음엔 학생들은 총추위의 결정 사항을 공지 받지도 못했다. 『대학신문』 기자가 총장선출행정지원단에 수차례 전화를 걸어 왜 학생들에게는 결정 사항을 공지해주지 않냐고 항의했지만 “총추위에서 그렇게 결정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정책평가 참여율이 저조했던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학생들도 정책평가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홍보는 분명 충분했다. 그러나 학생회든 본부의 관련 부서든 학생들이 왜 총장 선출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야 하는지, 학생들이 총장 선출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설득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학생 참여 결정부터가 참여비율이나 방식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채로 이사회에서 결정해야 하는 기한이 다가왔고, 총장직선제를 주장하던 학생회가 한발 물러서면서 ‘적당히’ 결정된 결과였으니 말이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직원들 역시 참여 비율과 참여 범위 등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기했으나 진지하게 논의될 시간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많은 구성원이 참여하는 총장 선출이 학내 사회를 편 가르고, 대학을 정치적 술수의 장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총장 선출이 단순히 총장을 뽑는 것을 넘어서 구성원들이 서울대가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교육적 축제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때를 놓쳐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많은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벼락치기’로 한 번 한 번의 총장 선출을 넘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울대의 ‘평소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음 총장 선출이 다가오기 전에 그 방식에 대해 미리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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