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경 교수
언론정보학과

오랜 외국 생활을 접고 서울대에 부임한 지 5년이 지났다. 유학으로 결혼, 육아 모두 늦어져서 여자들이 심하게 겪는다는 40대 초반의 우울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50대에 들어서며 국경을 바꾸어 이직했으니, 또다시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북돋아야 하는 현실에 놓였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나의 객관적인 위치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곧 알게 됐다.

81학번인 나는 이름하여 386세대이고 베이비붐 세대의 끝물에 속한다. 우리 세대는 졸업정원제로 부풀려진 대학에 본고사 없이 진학한 첫 학번이다. 점진적 감소를 보이던 청소년 인구는 급기야 대학정원이 수능인구보다 많은 상황도 창출했다. 1.0%에 육박하는 한국의 출산율이 의미하는 것을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지표는 단지 전반적인 한국 대학의 위기를 말할 뿐만 아니라, 활동적 노동인구의 감소와 베이비붐 세대가 사회복지 수혜대상인 노령인구로 진입하게 되면 엄청난 국가 경제의 부담이 생길 것을 예고한다. 세금을 낼 노동인구는 줄고, 평생 노동의 대가로 의료혜택을 필요로 하는 퇴직인구가 늘어난 가분수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내가 속한 베이비부머는 이러한 미래의 초상 속에서, 알바로 피곤한 청년들과 지하철의 자리를 다투는 지금의 노인들보다 악역을 배정받을 것이다.

한때 386이라는 우리 세대의 형용사가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박찬욱의 자신감 넘치는 영화들은 90년대 중반 왕가위의 영화를 보며 느꼈던 열등감을 해소해줬고, 봉준호의 영화들은 <헐리웃키드의 생애>의 비애를 쓸어내 줬다. 무엇보다도 민주화 동력의 주체였다는 자부심과 80년대의 경제성장이 제공한 일자리로 자존감을 쌓은 이 세대는 빠르게 정치, 경제, 사회 기득권으로 진입했다. 2018년 현재, 한국은 바로 이 386세대의 유산과 씨름 중이다. 이 세대는 민주를 쟁취하는 데 능력을 보였으나 성차별에 무감했고 세대 간 민주적 관계 정립에 무능했다. 민주를 외쳤으나 룸살롱 접대와 성희롱의 일상을 수용하고 일터의 권위적 갑의 자리를 내화했으며, 딸들을 독립적이고 유능하게 키웠으나 그 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아들들을 교육하는 데 실패했다. 워크맨이라는 최초의 1인 미디어를 사용했음에도 개인주의를 충분히 내화하지 못했고, 유교적 한국의 전통 속에서 부모를 모셨으나 자식의 봉양을 받지 못할 것이 자명한 첫 번째 세대다.

이런 50대를 서구에서는 ‘제3의 나이’(The Third Age)라고 부른다. 한국사회에서는 이 개념이 어린이, 청장년 다음의 세대라기보다는 청년과 노년 사이의 세대, 호미 바바의 ‘제3의 공간’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두 세대가 섞이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새로운 것이 창안되고 변화하는 시간적 공간으로서의 제3의 나이. 여기에 속하는 386세대가 한국사회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유의미한 혁명은 새로운 노년을 발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농촌과 도시의 장점을 혼합한 친환경적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고, 청년들을 훈계하고 젊음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없이 주어진 가족관계에서 벗어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선택한 좋은 친구들과 좋은 경험을 디자인하는 삶을 꿈꾼다. 청년들의 몸과 취향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말고 넉넉해진 몸을 매력적으로 감싸는 옷, 깊어진 정신에 어울리는 관계와 소비를 추구한다. 이렇게 살다가 자신이 스스로와 주변에 무거워질 때, 비싼 병실 침대에 몇 년씩 묶여있기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생을 마감할 선택권을 갖기를 원한다. 주변에서 이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창출을 위해 분주한 지인들을 보면서, 우리 세대의 마지막 투쟁을 본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조용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