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박물관 ‘다산 정약용 해배 200주년 특별기획전: 정약용, 열수에 돌아오다’에 다녀오다

오늘날 한강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휴식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정약용에게 열수(한강)는 이와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가졌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해배* 이후 거주했던 마재마을은 한강이 흐르는 지역이기 때문에 한강의 옛 이름인 열수라고 불렸다. 22일(화) 찾아간 마재마을에는 실학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상설전시실에서는 실학의 전반적인 역사와 정약용의 실학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었고, 기획전시실의 ‘다산 정약용 해배 200주년 특별기획전: 정약용, 열수에 돌아오다’에선 열수라는 공간이 갖는 중요성을 엿볼 수 있었다.

실학박물관의 상설전시관에는 실학이 태동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실학의 이론적 전개가 소개돼 있었다. 상설전시실의 해설을 맡은 김종욱 문화해설자원봉사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며 “당장 먹을 수 있는 식량조차 부족했으며 국토가 황폐화되어 농사를 짓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기이원론을 두고 다투는 등 형이상학적인 논의만을 펼치고 있었다. 한편 서양 문물이 전래되면서 더 이상 세상이 주자학적인 세계에 갇혀 있지 않다는 생각이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김종욱 씨는 “사람들이 점차 세계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며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통해 국가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일부 학자들은 민생구제를 위해 유교 경전을 재해석하며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학문, 즉 실학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김종욱 씨는 실학의 흐름이 1대 반계 유형원에서 2대 성호 이익으로 이어지며 3대 정약용 때 가장 융성했다고 설명했다. 초기 실학은 국가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개혁을 추구했다. 실학의 비조*라 불리는 반계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토지제도 개혁을 중심으로 노비제의 개혁, 동전의 유통 등을 주장했다. 성호 이익은 토지 개혁론인 한전론을 주장했으며 화폐 발행이나 상공업 장려에 반대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약용은 다양한 분야로 나뉜 실학의 학문적인 통합을 이끌어냈다. 그는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를 모두 아우르며 두 학파의 주장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했다. 정약용은 『경세유표』를 통해 행정기구의 개편 및 토지 제도 개혁을 주장하며 그의 농업과 산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집약시켰다. 또한 그는 거중기를 발명해 건축 분야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저서 『마과회통』 등을 통해 자신의 기술과 과학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학박물관엔 정약용이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일하던 당시를 보여주는 자료도 전시돼 있다. 김종욱 씨는 “정조가 직접 출제한 시험의 석차표에서 정약용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불리는 정약용에게 후기 학문 활동의 배경이 된 곳은 ‘열수’다. 보통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에 제자들과 함께 수많은 책을 집필했다고 전해지나 해배 이후 정약용의 삶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열수라는 공간은 다산 학문의 최종적 집약지로서 의미를 가진다. 해배 이후 정약용은 18년을 열수에서 보냈으며 그의 저술을 총 정리한 『여유당전서』도 강진 유배시절의 기록을 바탕으로 해배 이후 열수에서 탈고된 뒤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관 때부터 2013년 초까지 해설을 담당했던 실학박물관 황미정 직원은 “정약용 선생은 유배 때는 18년 간 제자들과 집필하기에 바빴다”며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약한 공간이 해배 이후의 열수였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열수는 당시 당파를 초월한 학문적 공론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황미정 씨는 “정약용 선생은 실학 연구에 그치지 않고 해배 이후에도 경학을 꾸준히 연구했다”며 “당파를 막론하고 경학을 논하고자 한 사람들은 열수에 모였다”고 이야기했다. 당파 간 다툼과 경쟁이 극심했던 당시 같은 남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론이었던 석천 신작이나 노론이었던 안동 김씨의 김매순 등과도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큰 시사점을 남긴다.

실학박물관의 상설전시실과 특별기획전에선 정약용의 학문적 업적을 넘어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그의 생애와 관련된 사료도 전시 중이다. 이야기는 남편을 그리워하던 부인이 결혼 당시 입었던 치마를 정약용에게 보낸 것에서 시작된다. 정약용은 부인이 보낸 치마폭을 찢어 책을 만드는 종이와 그림을 그릴 도화지로 사용했다. 이 치마폭에서 『하피첩』과 <매화병제도>가 탄생했다. 김종욱 씨는 “상실전시실에 있는 『하피첩』은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교훈을 적어 만든 책이며 <매화병제도>는 살아남은 하나뿐인 딸의 결혼 때 직접 참여하지 못한 아버지 정약용이 딸에게 전하는 시화”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특별기획전에서는 정약용이 북한강 여행길에서 풍류를 즐기며 지은 시가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열수는 정약용이 태어나 15년의 유년시절을 보낸 공간인 동시에 해배 이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삶을 정리했던 공간이다. 이처럼 정약용의 삶이 집약된 공간이었던 열수에선 200년이 지난 지금도 정약용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해배: 귀양을 풀어 줌.

*비조(鼻祖): 어떤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 또는 모든 사물의 시초.

사진: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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