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라파엘 로자노 헤머 ‘디시전 포레스트’전에서 과학기술의 명암을 체험하다

지난 3일(목)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에서 라파엘 로자노 헤머의 ‘디시전 포레스트’(Decision Forest) 전이 열렸다. 그곳에선 관객의 목소리, 맥박, 지문이 모두 예술 작품이 된다. 각각의 관람객들의 몸짓에서 비롯된 이 신호들은 서로 더해지고 중첩돼 새로운 작품으로 탈바꿈한다. 작가의 일방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던 작품들이 관람객 참여로 인해 비로소 완전한 예술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Interactive Media Art)를 구현하기 위해 라파엘 로자노 헤머는 현대의 과학 기술을 도입해 작품을 표현해냈다.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면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작품들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다. 지하 1층의 한쪽 면엔 ‘샌드박스’(2010)가 전시돼 있다. 관람객들은 스크린을 통해 손의 이미지를 모래사장에 투사시키고, 모래 위를 거닐며 공간을 점유하고 직접적으로 작품에 개입한다. 단조롭던 모래사장은 관람객들의 활발한 참여로 생기를 띠고 더욱 다채로워진다. 작가는 “아무도 없으면 의미가 없는 공간인 샌드박스는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이라며 작품의 의의를 설명했다. 한편 샌드박스를 지나쳐 다른 구역으로 들어서면 ‘플리즈 엠티 유얼 포켓’(2010)이 자리하고 있다. 작품명에서 알 수 있듯 관람객이 주머니의 소지품을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리면 해당 이미지가 이미 저장된 이전 관람객들의 소지품들과 함께 나타난다. 최대 60만 개의 사물들을 기록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백지에서 시작해 오롯이 관람객들의 참여로 완성된다. 주머니 속 사물을 올려놓는 간단한 행위를 통해 관람객도 주체로서 작품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관람객의 참여를 돕는 이런 기술이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세 벽면을 CCTV 영상으로 가득 메우고 있는 ‘줌 파빌리온’(2015)은 과학 기술이 인간을 끊임없이 감시한다는 사실을 부각했다. 관람객이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다각도에서 비춘 관람객의 얼굴이 벽면의 스크린에 생중계된다. 이때 관람객은 전시장에서의 행동이 모두 감시당하고 기록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에 작가는 “인간을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기술이 인간을 구속해선 안 된다”고 작품이 비판하고 있는 점을 설명했다. 기술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은 ‘에어본 뉴스캐스트’(2013)에서도 엿볼 수 있다. 관람객이 언론매체에서 생중계되고 있는 기사 앞을 지나가며 빔프로젝터의 빛을 차단하면 이들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감시시스템이 관람객의 그림자를 쫓는다. 실제로 관람객의 그림자가 스크린 앞에 머물자 기사의 활자는 연기가 돼 흩뿌려졌고 이어 다른 기사가 그 공간을 채웠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행동이 기술에 의해 감시될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전시는 현대 과학 기술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다뤄냈다. 작가는 인간과 소통하며 불러일으키는 과학기술의 긍정적인 효과와 더불어 기술이 인간의 삶을 통제하고 제한할 수 있다는 위험성까지도 주목한다. 라파엘 로자노 헤머는 디시전 포레스트 작가 간담회에서 “치안 유지에 도움이 되지만 개인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CCTV처럼 기술의 양면성이 주는 유희가 있다”며 “우리를 둘러싼 기술이 갖는 양면성에 주목해 작품을 구상했다”고 작품 활동의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전시회에 참여한 송우경 씨(24)는 “그간 과학과 예술을 함께 작품으로 나타내는 전시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그치는 경향이 있어 아쉬웠다”며 “이번 전시는 과학기술이 관람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말했다. 작가와 소통하며 작품에 각자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전시 ‘디시전 포레스트’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Zoom Pavilliom’(2015)에선 이전에 방문한 관람객들의 얼굴이 저장돼 그 영상이 축적된다. 관객의 얼굴을 모아 재생한 영상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사진: 대학신문 snupres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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