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269조의 이 짧은 한 줄은 2010년 헌법재판소의 도마 위에 올랐고 4:4의 팽팽한 대립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해 2월, 낙태죄에 대한 헌법소원이 한 의사에 의해 다시 제기됐다. 낙태죄 존치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7일 광화문 중앙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의 목소리를 『대학신문』이 들어봤다.

한 집회 참가자가 낙태죄 조항에 X자를 친 헤나를 한 채 피켓을 들고 있다.

다양한 배경, 하나의 목소리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 5시,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은 수많은 여성단체의 깃발들을 들고 드레스코드에 맞춰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로 들어차 있었다. 집회는 여성운동의 역사를 소개하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영상이 나오며 시작됐다. 이어진 시민발언에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처음으로 발언대에 나선 천주교 신자 베로니카 씨는 “여성의 낙태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도, 신부님도, 수녀님도 아니라 여성 자신”이라며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낙태죄를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천주교적 신념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정(활동명) 씨 역시 “피임이나 출산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 없이 낙태를 막는 것은 여성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라며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다.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해상에서 자연유산유도약을 제공하는 국제단체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을 창립한 레베카 곰퍼츠 씨도 집회에 참여해 연대발언으로 지지를 표했다. 곰퍼츠 씨는 아일랜드 등 이미 낙태죄가 폐지된 나라들을 호명하며 한국도 낙태죄 폐지에 동참할 것을 역설했다. 시위에 남편과 함께 참여한 최자영 씨(61)는 “낙태죄 문제는 여자의 건강권이나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의 문제”라며 “나도 낙태 경험이 있었고, 많은 아픔이 있었다. 낙태하는 사람들이 안전한 의료조치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집회 참여 이유를 밝혔다.

집회 참가자들이 피켓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날 시위에는 약 1,500명(경찰 측 추산)의 시민이 참여했다.

그 아이는 과연 절규하고 있었을까

낙태 반대를 위해 1984년 미국에서 제작된 교육 영상 ‘소리 없는 비명’(The Silent Scream)에 대한 비판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우리나라의 성교육 시간에도 자주 쓰였던 이 영상은 낙태 수술을 태아가 칼을 피해 도망 다니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낙태의 잔인함을 부각한다. 물론 영상에서처럼 기계로 자궁 내막을 긁어내는 소파술을 이용할 경우 태아를 조각내어 흡입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상에 등장하는 12주 정도의 태아는 영상의 묘사와 달리 고통을 느끼거나 칼에 의식적으로 반응할 수 없으며, 태아가 지르는 ‘비명’ 또한 단순히 태아가 입을 벌리는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의료계의 중론이다. 또한 영상에서는 낙태 과정을 설명할 때 완전히 자란 아기 모형을 사용했지만, 실제로 12주 된 태아는 사람의 형상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이며 크기도 모형보다 훨씬 작다. 영상의 묘사가 사실을 호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조작된 영상으로 낙태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과 죄의식을 유발하는 성교육이 낙태에 대한 근거 없는 부정적 인식의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 집회에 참가한 낙태죄 폐지론자들의 주장이다.

맞서는 찬반양론 속 균형점을 찾아라

집회 참가자들은 낙태죄 존치론자들의 주장을 반론하기도 했다. 낙태 반대 측의 주된 논거로 이용되는 생명경시 풍조 확산 우려에 대해, 집회의 참가자들은 낙태의 합법화가 무분별한 낙태를 조장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 스태프로 참여한 권보현 씨(23)는 “의료기술이 발전한다고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듯, ’낙태하면 되니까’ 하고 생각하는 여성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낙태죄가 폐지될 경우 낙태를 원치 않는 여성이 주위의 낙태 종용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작년 11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러한 이유로 낙태죄의 폐지를 반대한다는 한 미혼모의 청원이 올라와 2만여 명의 동의를 받았다. 집회에서 시민발언을 한 ‘녹색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윤정원 씨는 이에 대해 “여성이 남성의 강요라든지 의사의 종용에 의해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판단이 깔린 주장”이라고 비판하며 오히려 “낙태죄의 존치가 여성을 범죄자로 만들어 여성을 더 취약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시위를 참관하던 미국인 토리 매글비 씨(53)는 이런 시위가 낙태 합법화를 이끌어낼 것으로 예상하냐는 질문에 “미국에서도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인 만큼, 한국에서 낙태죄가 합법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답했다. 오는 9월 헌법재판관 중 5명의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낙태죄 위헌 여부는 그 전에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만큼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집회 참가자들이 낙태죄 폐지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 주위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 신하정 기자 hshin15@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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