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은 길을 잃지 않는다 -어떤 청맹과니의 독백

20세기가 끝장날 때 정년을 맞았소. 푹, 하고 한숨이 나왔소. 물론 안도의 한숨이었소. 그 지랄 같은 20세기가 끝장났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렇지만 내겐 그것밖에 없었소. 그 속에서 낳고 배웠고, 그 중 33년 6개월 동안 세상이 서울대학 또는 관악산 학사라 부르는, 월급이 제일 적은 직장에서 전위(前衛) 속의 후위(後衛)로 자처하며 사랑하고 성내며 살았소. 무엇을 사랑했던가. 또 무엇을 미워하며 성냈었던가. 나머지 생애를 두고 이를 되새기며 살기로 작정하니 휘파람이 절로 나왔소. 무대 바깥에서 굉장한 21세기를 구경하며 아주 천천히 사랑했음과 성냈음과 미워했음도 음미하리라. 그만한 여유와 권리가 있으리라 믿었소. 첫해엔 그럴듯하게 보냈소. 그 다음 해가 되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소. 이른바 인문학이 빈사상태에 빠졌다는 소문이 무대 뒤에서 요란했소. 내가 사랑한 인문학이 아니었던가. 만일 사실이라면 누가 무슨 까닭으로 그 인문학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혹시 그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의 하나에 나도 끼어 있지 않았을까. 한밤중 홀로 앉아 생각해 보아도 서재를 서성거리며 캄캄한 뇌우(雷雨)와 모진 구름 속에서 내가 익힌 몇 알의 붉은 열매들을 꺼내어 다시 읽어보아도 불안은 가시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어갔소.

 

문학은 곧 국학, 독립운동하기와 진배없다

 

어째야 좋을지 안절부절하는 중, 뜻밖에도 내가 몸담았던 인문학 쪽에서 한 강좌 강의를 의뢰해왔소. 잠시 망설였으나 수락했소. 인문학이 과연 빈사상태인가의 여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까닭이오. 어떻게 확인하는가. 내가 해온 인문학을 뿌리째 드러내보이는 길이 그것이오. 정신이 과학을 압도했던 인문학. 식민지 사관 극복의 그 맹렬함. 한 학기 동안 정신없이 떠들었소. 요약하면 간단명료하오. 인문학 곧 국학(國學)이다, 국사학? 국어학? 국문학이란 그 자체가 성스럽다. 어째서?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하기와 진배없으니까. 종사하는 당사자도 주위에서도 알게 모르게 이 대명제를 전제하고 있었다, 라고. 강의를 마치자 참으로 조용했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소. 세계 경제규모 12위권의 강국이며 GDP 1만 수천불에 이른 판에 무슨 잠꼬대냐. 지역국가조차 넘어선 이 판국에 무슨 국민국가 과정인가, 라고.

 

 

그러고 보니 그들은 신코스모폴리탄들이 아니겠는가. 우리집, 우리동네, 우리학교, 우리나라 만세 따위란 안중에도 없는 신종족이 아니겠는가. 이 신종족이 어찌 학벌주의 따위에 연연하며 또 매달릴까보냐. 세계 속의 오직 ‘나’, 유아독존이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줄서기하되 세계 속의 줄서기가 있을 뿐. 놀라워라! 거듭 놀라워라. 아, 못 올 데를 왔구나, 혼자 한숨지으며 비틀거리며, 모가지가 댕겅 잘렸으나 그래도 왕성히 그 넓적한 잎을 펼치고 있는 인문관 옆 마당 플라타너스 밑 의자를 가까스로 찾아가니, 누가 보다 둔 대학신문이 놓여 있지 않겠는가. 한때 내가 자문위원으로 있었던 그 대학신문. 학생기자와 자문위원들이 내보낼 기사를 두고 매주마다 자체검열로 싸우며 안타까워했던 그 대학신문이 아니겠는가. 천천히 그리고 단호히 펼칠 수밖에. 눈에 제일 먼저 그리고 크게 띈 것이 있었소. 「‘서울대 폐지론’을 대학개혁의 계기로 삼자」 (2004. 6. 7)가 그것. 대번에 그리고 단호히 읽었소. 그리고 놀랐소. 누군가 ‘서울대 폐지론’을 외치고 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소. 누군가 ‘서울대 폐지론’을 외친 그 외침이 예사롭지 않음도 대번에 알 수 있었소. 대학신문에서 눈을 떼자 플라타너스 앞에 가려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소. 또한 그 청청한 플라타너스 잎이 검게 보이지 않겠는가. 길을 잃을 수밖에.

 

자기 뼈를 625밀리나 깎아내며 모질게 몸 낮추며 눈뜬 관악산

 

지팡이도 없이 심봉사가 되어 버스정류장을 더듬거리고 있자니 누군가 내 옷깃을 이끌지 않겠는가. 흰 화강암 푯말이었소. ‘민주열사 박혜정’의 기념비. 시인 고은이 불멸의 성좌의 하나로 「만인보」(1988)에서 읊은 그 박혜정. 나를 지도교수로 했던, 이마가 유달리 튀어나온 박혜정(1983). 그가 청맹과니 모양의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인도해주지 않겠는가.

 

 

이것이 가까스로 내가 관악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전말이오. 한갓 청맹과니도 그러할진댄 항차 자기 뼈를 625밀리나 깎아낼만큼 모질고도 몸낮추며 눈뜬 관악산임에랴.

▲ © 대학신문 사진부

김윤식 명예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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