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수강신청 제도를 위해

본부 예산이 넉넉하지 못한 관계로 고용할 수 있는 교원의 수에도, 열 수 있는 강의의 수에도 제한이 있다. 이렇게 개설된 강의엔 교수가 희망하는 수업 방식, 강의실 사정 등에 따라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고, 수강신청은 선착순이다.

듣고 싶은 강의와 들을 수 있는 강의 사이에서

◇운이 결정짓는 한 학기=서울대는 예전부터 해왔고,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완전 선착순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손의 빠르기’가 수강신청의 성패를 결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수강신청 결과에는 클릭 속도 외에도 운이 추가로 개입된다. 현재 정보화본부에서는 수강신청을 위해 서버 4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수강신청 사이트 접속자들은 수강신청 시작과 동시에 시스템상 각 서버에 무작위로 분배된다. 정보화본부 이덕임 행정관은 “서버 4대를 같은 조정값으로 운영하는데도 더 빠른 서버가 있다”며 “빠른 서버에 연결된 학생들이 수강신청에 성공할 확률이 높으므로 수강 가능한 강의는 실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클릭 속도, 어쩌면 속도를 초월한 ‘운’에 따라 한 학기가 좌우되는 것이다.

◇듣고 싶은 강의는 어떻게 결정되나=수강신청이 치열한 과목은 많은 학생이 들어야만 하는 강의와 많은 학생이 듣고 싶어 하는 강의, 주로 두 가지다. 교수의 강의력이 뛰어나 재밌는 강의나 수행해야 할 과제와 시험의 양이 적고 학점을 후하게 주는 소위 ‘꿀강’ 등이 많은 학생이 듣고 싶어 하는 강의에 해당한다. 졸업을 앞둔 A씨는 “학내 커뮤니티나 지인을 통해 들은 강의 후기와 강의 계획서를 바탕으로 꿀강의 여부를 판단해왔다”며 “학점이 낮으면 취업시장에서 불리할까 걱정되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생각에 학업 부담이 적고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는 강의를 골라 듣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많은 학생들이 꿀강을 찾아 헤매기에, 꿀강이라 이름 붙은 과목들은 입소문을 타고 ‘수강신청 난이도 상(上)’의 고지에 우뚝 서 수강신청 과열을 이끈다.

제도의 틈을 비집고 피어난 편법들

◇학번 대여가 연 1인 n아이디의 시대=수강신청이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몇몇 학생들은 지인의 학번을 빌리곤 한다. 복수의 아이디로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학번 대여는 주로 군 휴학생, 일반 휴학생, 교환학생 예정자, 본과 진입 예정인 의·치대생, 졸업 예정자 등 수강신청을 할 필요가 없거나 수강할 과목이 사전에 정해져 있어 당일에 수강신청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학생들의 수강신청 사이트 아이디를 빌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학번을 대여한 학생들은 빌린 아이디로 수강신청하고, 후에 그 아이디로 신청한 강의를 취소해 자신의 원래 아이디로 즉각 재신청하는 방식이다. 이는 휴학생과 졸업 예정자가 다가오는 학기를 위해 수강신청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음에도 이들에게 수강신청이 완전히 열려 있고, 현 수강신청 시스템이 정해진 시각 안에선 강의를 자유롭게 취소하고 다시 신청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학칙엔 복수 아이디 사용과 관련한 조항이 없어 직접적인 규제 대상에 해당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형평성에 어긋나고, 수강신청 과열을 증폭시키는 편법이라는 점에서 규제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필호 씨(국어국문학과·17)는 “아이디 대여는 원칙을 지켜 본인 아이디 하나로 수강신청에 참여하는 학생과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모든 학생에게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절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복수 아이디 사용은 수강신청 과열을 증폭시키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원래라면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수요를 경쟁에 투입함으로써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복수의 아이디로 구한 강의 중 남는 강의가 강의 암시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수강신청 과열로 학번 대여가 성행하고, 여러 개의 학번으로 수강신청하다 보니 실제로는 안 쓰는 잉여 강의가 생기고, 이렇게 생긴 잉여 강의가 시장에 나와 강의 거래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수강신청 후 학생들이 SNS 커뮤니티에서 강의를 구하고 있다. (사진출처: 페이스북 서울대 커뮤니티 화면 캡처)

◇“OO강의 구합니다. 사례할게요.”=수강신청 직후, 서울대 학생들로 구성된 SNS 커뮤니티 등지에는 강의를 구하는 각종 글이 쏟아진다. 저마다 가진 간절한 사연과 함께, 강의만 구한다면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다는 문장도 종종 눈에 띈다. 강의 거래에 동반되는 보상의 규모는 몇천 원짜리 기프티콘에서 10만 원이 넘는 금액의 현찰까지 다양했다.

교양과목 '죽음의 과학적 이해'를 담당하는 유성호 교수(의과학과)는 자신의 강의가 암시장에서 자주 거래되는 것에 관해 “교양과목이란 마음의 양식을 쌓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 도입된 강의 종류인데, 교양이란 것이 물질적 가치로 치환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강의 거래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드러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학사과는 “최근 강의를 듣기 위해 정해진 제도 외적인 방법까지 이용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모두가 등록금을 내 공평하게 강의를 듣고 교육받을 권리를 갖는 상황에서 수강신청 양도 및 매매와 같은 부정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거래가 이뤄지는 현장을 모두 살피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현실적으로 규제가 쉽지 않다”는 입장을 전했다.

학생들의 경우 강의 거래가 비정상적인 현상이란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일부는 이런 현상의 불가피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류의정 씨(영어영문학과·17)는 “전공 필수과목과 같이 꼭 들어야 하는 과목이 아니면 굳이 추가로 지출까지 해야 하나 싶다”며 “‘안 들으면 팔지 뭐’라는 생각으로 몇몇 인기 강좌를 일부러 신청해두는 사람들이 있던데 강의를 진심으로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돈을 주고받는 행위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인문대에 재학 중인 B씨는 “요즘 수강신청이 과열돼 웬만한 강의는 신청하기 너무 힘들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그는 “수강신청 능력이나 운이 부족해 수강할 자격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얻기 위해 본인이 노력해서 강의를 구하고 개인적으로 대가를 지급한 것이므로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보다 공정한 수강신청 제도가 되려면

◇제도 개선 시도와 계획=2016년, 수강신청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쇄도하자 본부 주도로 ‘수강신청 운영 개선 TF’팀이 꾸려져 몇 차례에 걸친 회의를 진행, ‘장바구니 제도’라는 개선안을 고안해냈다. 학사과는 총학생회(총학)과 협력해 개선안에 대한 선호도를 묻는 설문조사까지 진행했지만 학생들의 지지를 크게 얻지 못해 개선 시도는 결국 흐지부지 무산됐다. 그 후 학사과에서 기존 홀짝 수강신청 순서를 바꾸는 등 사소하게나마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해 제도에 반영해왔으나, 학생들 사이에서 수강신청 제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많은 것에 비해 실질적인 개선 논의는 지지부진해 주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다만 학사과는 최근 관련 문의 및 민원을 토대로 학번 대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한 결과, 복학을 승인받지 않은 휴학생의 경우 수강신청을 제한하는 안을 마련해 현재 의견 수렴 과정을 앞두고 있다. 총학 또한 현행 수강신청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대응 방안을 검토 중이다. 총학은 지난 7월 19일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학번 대여와 같은 편법 사례가 만연한 상황과 대응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수강신청한 강의를 취소했을 때 바로 빈자리가 나는 것이 아닌, 무작위로 일정한 시간 뒤에 빈자리가 나는 방식을 고안했다. 신재용 총학생회장(체육교육과·13)은 “이 제도가 도입될 경우 즉각적인 강의 양도가 불가하기에 학번 대여와 강의 거래를 차단할 수 있다”며 “향후 본부와 회의를 통해 개선안을 발전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른 대학에서는?=연세대, 경희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다른 대학들도 자교 수강신청 제도에서 포착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개선안을 도입하고 있다. 먼저 연세대는 수강신청 과열로 포탈 서버가 다운되고 인기과목이 매매되는 현상을 차단하기 위해 자체 개발한 ‘마일리지 및 대기 순번제’를 사용한다. 학생들이 수강신청 전 받은 마일리지를 각 과목에 배분하게 해 선호도 중심으로 수강신청이 이뤄지도록 하고, 배분한 마일리지가 부족해 강좌 신청에 실패했을 경우 대기 순번을 부여해 기존 신청자가 취소하면 대기 번호 순서대로 빈자리가 채워지는 시스템이다. 마우스 클릭 속도가 아니라 과목 선호에 따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수강신청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대기 순번제를 도입하면서 타인이 신청한 강의를 본인의 계정으로, 또는 그 반대로 본인이 신청한 강의를 타인의 계정으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해져 위에서 언급한 학번 대여와 강의 거래가 거의 차단된 상태다.

경희대와 KAIST의 경우 강의 매매를 없애기 위해 이번 가을학기부터 수강신청 변경기간 및 절차에 변화를 줬다. 경희대는 ‘취소-신청 지연제’를 채택했다. 이는 정원이 모두 찬 강좌에 빈자리가 발생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수강신청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강의에 빈자리가 나면 학생에게 빈자리의 개수와 신청 가능 시간 정보를 제공해 수강을 희망하는 학생이 지정된 시간에 새로 난 빈자리에 대해 수강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KAIST는 매일 수강 취소 및 신청 시간을 별도로 운영한다. 수강신청 변경 기간 동안 하루를 반으로 나눠 자정부터 정오까지는 수강 취소만, 정오부터 자정까지는 수강신청만 가능하게 설정했다. KAIST는 공지를 통해 “최근 학생들 사이에 수강신청 과목이 매매되고 있다는 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수강신청 시스템 개선 이슈가 제기됐다”며, 강의 양도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절차를 변경했음을 알렸다.

◇모든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려면=수강신청과 관련한 모든 잡음을 소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교육 수요에 따른 공급이다. 강의를 듣고 싶은 학생 모두가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예산을 증액해 교원을 확충하고 이에 따라 개설 강좌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간단하지만은 않다. 작년과 올해 모두 국고 출연금이 삭감된 상황이라 본부의 재정적 여건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산과 김지현 과장은 “교육 및 연구 분야에 예산을 많이 투입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국고 출연금과 등록금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법인회계 내에서 추가로 특정 영역에 예산을 배당하긴 어려운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학교육연구소 임희성 연구원은 “여러 과목 중 보강해야 할 분야를 점검하고 학생들의 요구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기본적인 실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실태 조사를 바탕으로 가능한 여건 내에서 교원이나 강좌 수를 확충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학문의 기초’ 과목을 제외한 교양과목에 관해선, 학생들이 강의를 대하는 태도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강좌의 수업 내용보다는 교수가 얼마나 학점을 잘 주는지, 과제나 시험의 양이 적은지로 수강 희망 과목을 정하는 세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김필호 씨는 “학점 경쟁 등으로 인해 꿀강만 듣고자 몇몇 강의에 선호가 지나치게 몰리는 학내 분위기가 개선돼야 강의 거래를 포함한 여러 부작용이 줄어들 것”이라며 수강신청 과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지목했다. 유성호 교수는 이런 경향을 해소하기 위해선 교양과목의 성적 부여 방식을 변경하는 방안 또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생들의 주된 선호 강의 판단 기준이 교수의 성적 부여 경향이 되지 않고, 온전히 수업 내용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평가 방식을 전부 S/U로 전환하는 등의 조치가 행해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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