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빈 편집장

조금은 부끄러운 어린 날의 기억을 하나 꺼내본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소한 어떤 일을 두고 의견을 나누다 아버지와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지기 싫어하고 고집만 세던 나는 겁도 없이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댔다. 그에 화가 난 아버지는 늘 열려 있던 안방 문을 아예 잠가버렸다. 굳게 닫힌 문은 그때까지 내가 겪어본 것 중 가장 극심한 공포의 신호였다. 두려운 마음에 문을 계속 두드리고, 깃털같이 가벼운 죄송하단 말을 끊임없이 건넸다.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문 너머에서 아버지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는 받아줄 사람이 마음이 있을 때 하는 거지, 그렇게 하는 건 사과가 아니다.”

흔히 사과라는 행위의 주체를 미안하단 말을 건네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내가 네게 사과한다’는 예문을 통사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주체는 당연히 ‘나’가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사과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는 데 실패했을 때의 산물에 불과하다. 사과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과(謝過)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용서를 비는 것의 두 단계로 이뤄진다. 아무리 내가 내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애타게 용서를 구해도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오롯하게 상대의 몫이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과의 과정은 완료될 수 없다.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건 내 사과의 상대뿐이다. 그리하여 이 사과의 끝을 정하는 건 결국 내 사과의 상대뿐이다.

그렇다고 상대의 마음이 바뀌어야만 비로소 사과가 유효해지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사과가 계속되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사과를 받아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무작정 우겨대며 내 사과를 받아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폭력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번지르르한 말이 필요한 것도, 거대한 규모의 배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단지 진심을 담아 묵묵히 사과하는 것. 사과와 화해의 기본 원칙은 이렇게나 명확하고 간단하다.

2015년 한 합의로 설립된 재단이 있다. 이 재단은 이름부터 화해와 치유를 내세웠지만, 역설적으로 합의 과정에서는 피해자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의 결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이야기다. 일본 정부는 10억 엔의 돈으로 재단을 출연하고 운영함으로써 수십 년 전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고 문제를 종결시키려 했다. 여전히 그들을 용서하지 못한 피해자는 재단 해산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재단을 해산하지도, 그렇다고 당초 약속했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저 자리만 지키며 버티는 이유는 하나다. 일본은 필요한 대응을 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국제연합(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피해자 중심의 대응을 촉구하는 권고안을 공표했다. 일본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그들의 사과에는 진짜 사과를 받아야 할 ‘위안부’ 피해자란 존재가 애초에 없었다.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있는 피해자들에겐 그저 그들이 ‘충분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사과와 배상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꾸준히 외면당하고 있다. ‘화해·치유재단’의 즉각 해산 요구가 번번이 묵살된 덕에 일방적 사과의 증표로 남아 있는 이 답답한 상황에서 나는, 어릴 적 아버지의 교훈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그렇게 하는 건 사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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