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진 부편집장

빛이 입자인지 아니면 파동인지에 대한 질문은 오랫동안 물리학계에서 큰 논쟁거리였다. 중력 이론을 확립한 뉴턴은 빛은 입자라고 믿었고, 그로 인해 19세기 이전까지 빛은 입자라는 게 물리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호이겐스에 의해 처음으로 주창된 빛의 파동성은 이후 1801년 영의 이중슬릿실험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됐고, 1873년 맥스웰에 의해 이론적으로도 확립되면서 빛은 파동이라고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빛의 파동성은 빛을 금속에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없었는데, 1905년 아인슈타인이 빛의 입자성을 통해 광전효과를 설명하면서 물리학자들은 수 세기에 걸친 논쟁 끝에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모두 가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드브로이는 물질파 이론을 통해 빛뿐만 아니라 야구공에서부터 음파까지 모든 형태의 물질이 입자성과 파동성을 모두 갖는 이중성을 지닌다는 걸 밝혀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물질이 이중성을 갖는데, 사람들이 이중적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수도 있겠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강조하던 대선후보는 자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행하던 여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했다. ‘미투(MeToo)’를 적극 지지한다던 집권여당은 정작 소속 국회의원의 미투 폭로에 따른 사퇴를 “사퇴할 만한 일이 아니”라며 번복시켰으며,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기용한 청와대 선임행정관의 여성혐오 논란에 대해선 눈감았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운다던 한 자동차기업의 노조는 정작 자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합원에서 배제시킴으로써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외면했다. 시민단체 출신으로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방만한 경영을 앞장서서 비판하던 전직 국회의원은 정작 피감기관 및 민간기업의 돈으로 외유성 해외출장을 다녀온 것으로 드러나 18일 만에 금융감독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이중성을 따지고 있는 나 자신부터가 지극히 이중적인 사람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장애학생들의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도 ‘병신’, ‘장애인이냐’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써왔다. ‘미투(MeToo)’에 의해 추악한 본모습이 폭로된 유명인들을 비판하는 나 자신부터가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음담패설을 얼마나 많이 해왔는가.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의 억울함을 담은 기사를 쓰면서도, 당장 내 곁에 노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나설 일이 아니야’라고 자위하며 침묵하고 외면했다. 재작년 겨울 나랏돈을 쌈짓돈으로 쓴 대통령과 그 측근에 분노하며 촛불을 든 나 자신은, 막대한 세금이 지원되는 대학신문의 재정을 관리하는 부편집장으로서 과연 얼마나 투명하게 관리했는가. 사람들의 이중성을 그렇게 혐오하던 나 자신이, 사실은 그 누구 못지않게 이중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으니 모두의 허물을 어느 정도 덮고 비판을 삼가자는 따위의 말이 전혀 아니다. 비록 자기 주변의 노동자의 어려움에 발 벗고 나서진 않더라도 다른 노동자들을 위해 싸울 수 있으며, 애인에게 ‘그래도 여자가 화장은 해야지’ 따위의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성범죄를 비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서서 비판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잘못들로 인해 상처를 받은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용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멀리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갖기 이전에 가까이 우리 주변,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면 어떨까.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잘못을 바꾸기 위해선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내 주변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선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 주변을 돌아보고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도 자연스레 바뀌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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