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미래, 개혁의 장벽 앞에 서다
북한의 미래, 개혁의 장벽 앞에 서다
  • 신동현 기자
  • 승인 2018.09.1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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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26일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끝났다. 사회주의가 무너진 러시아에는 급격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불어닥쳤다. 공산당은 권력을 잃었고, 계획경제 체제는 시장경제 체제로 대체됐다. 체제전환 과정에서 많은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탈사회주의 체제전환은 별장에서 캔 감자로 연명하고 탱크가 국회를 포격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모든 탈사회주의 체제전환이 이렇게 급격하고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공산당이 권력을 유지했다. 경제 체제는 점진적으로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시장경제로 이행했다. 북한은 예외였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한창 체제전환에 열을 올리던 1990년대에 북한은 변화를 거부한 채 고립을 택했다. 지난 4월 27일과 5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6월 12일에는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북한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7월 6일에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베트남식 개혁을 권유했다. 이에 따라 북한이 점진적인 탈사회주의 체제전환을 추진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대학신문』에서는 중국과 베트남의 탈사회주의 체제전환 사례를 통해 북한의 개혁 전망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1. 흑묘백묘: 중국의 개혁개방

1978년 시작된 중국 개혁개방의 배경엔 마오쩌둥 시대의 실패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야심차게 대약진운동*을 추진했지만, 그 결과는 수천만 인민의 아사였다. 곧이어 불어닥친 문화대혁명 시기에 사람들은 서로를 고발하고 의심했다. 학생들은 농촌으로 내몰렸고, 산업과 교육은 정지했다.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 1976년, 중국에는 피폐한 농촌과 산업, 교육받지 못한 청년층, 그리고 비효율적인 경제가 남아있었다.

중국인들은 피폐한 현실을 바라보며 변화를 염원했다. 정재호 교수(정치외교학부)는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중국 사회 저변에서 개혁개방에 대한 합의가 형성됐다”고 평가했다. 새로 출범한 덩샤오핑 지도부는 야심찬 개혁을 추진했다.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농촌 개혁이었다. 1976년의 중국 농촌은 20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수백 명을 하나의 생산단위로 묶어 운영한 집단농장 시스템의 비효율성이었다. 정 교수는 “큰 생산단위는 무임승차자를 가려내기 어려워 결국 모두가 못 사는 평균주의가 된다”고 설명했다. 1978년부터 중국 공산당은 생산대대에서 생산대로, 생산대에서 공작조로, 공작조에서 한 가족이 한 단위인 호별영농제로 생산단위를 줄여나갔다. 개혁을 시작한 지 6년이 지난 1984년엔 중국에서 집단농장과 기근이 자취를 감췄고 농촌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같은 땅을 경작하는 데 필요한 인원이 적어져 잉여 노동력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력이 필요한 도시의 기업들은 성과급을 얹어주면서 농민들을 도시에 데려왔다. 정 교수는 이를 “농업과 공업의 발전이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한 것”으로 봤다.

1990년대부터 중국의 개혁개방은 이전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됐다. 최우선 과제는 하나의 중국 경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자력갱생을 추구했다. 각 성(省)은 필요한 물건을 각자 생산해야 했다. 정 교수는 “중국의 31개 성에서 각자의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만들면 비교우위의 혜택을 누릴 수 없어 국가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은 지역 간의 원활한 교류를 가로막는 지역 보호주의적 제도를 철폐하고, 각 지역의 특화 산업을 발전시켜나갔다. 이런 기반이 마련되자 중국 정부는 개혁개방과 경제성장을 이끄는 주체로 나섰다. 정 교수는 “중국 공산당은 자원을 철저하게 통제해 집약적으로 경제를 키웠다”고 주장했다. 체제전환 과정에서 국유기업을 대부분 해체하거나 매각한 러시아와 달리 중국 공산당은 국유기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했고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를 통해 철저히 관리했다.

‘개혁’뿐만 아니라 ‘개방’ 역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지정한 경제특구에 한정해 개방하는 정책을 폈다. 정 교수는 중국의 개방을 잘 나타내는 말로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를 들었다. 1979년 공산당은 선전과 샤먼을 포함한 네 개의 도시를 개방했다. 1984년 중국 동해안 지역의 14개 도시가 개방되면서 네 개의 점이었던 경제특구는 동해안을 따라 늘어선 선 모양이 됐다. 1988년에는 양쯔강과 주강 지역, 1992년과 1994년에는 헤이룽장, 내몽골, 그리고 옌볜 지역까지 경제특구가 확장되면서 면의 모양이 됐다. 사실상 중국 전토가 개방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경제특구 위주의 개방을 택한 결정 뒤에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정재호 교수는 “30년 가까이 자력갱생과 순수한 사회주의를 추구한 중국 공산당이 외국의 기술과 자본을 얻어 개혁개방하는 것은 정당성에 위협이 됐다”며 한 번에 중국 전토를 개방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이 가장 먼저 개방한 네 도시는 수도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져서 정치적 위험이 크지 않은 광둥성과 푸젠성에 있다. 중국의 거대한 국가 규모가 경제특구 위주의 개방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김병연 교수(경제학부)는 “개혁개방 초기에 중국이 유치했던 화교 자본에 비해 중국의 국가 규모가 너무 컸다”며 “화교 자본을 경제특구에 집중시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중국은 한 단계를 넘어 다음 단계로, ‘돌다리를 손으로 짚어가며’ 조심스럽게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다.

1979년 최초로 개방된 네 개의 경제특구 중 하나인 푸젠 성 샤먼 시. (사진제공: pixabay.com)

2. 도이머이: 베트남의 체제전환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 전차가 사이공의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입성했다. 2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이 통일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에는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됐고 미국의 경제 제재는 베트남 경제를 어렵게 했다. 계획경제를 경험해보지 못한 구 남베트남 지역은 농업 집단화에 반발해 농업생산이 급락했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엔 중국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무리한 군비지출과 소련의 지원 감소는 가뜩이나 어렵던 베트남 경제를 악화시켰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았고 계획경제 체제는 휘청이기 시작했다. 계획경제의 실패는 공급의 부족으로 나타났다. 인민들은 텅 빈 국영상점 대신 암시장에서 비싸게 생필품을 사야 했다.

어려운 경제 사정은 베트남 공산당 보수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보수파에 의해 1983년에 축출됐던 개혁 성향의 응우옌반린이 1986년 총비서로 복귀했다. 응우옌반린은 같은 해 열린 6차 베트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대대적인 개혁인 도이머이 정책의 시작을 선언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개혁도 집단농장을 해체해 농업생산을 증대시키는 농업 개혁에서 시작됐다. 이를 통해 농촌은 도시에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재완 연구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베트남은 식량 자급이 가능한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농업이 도이머이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며 “도이머이에서 중요한 것은 제조업의 급속한 성장”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는 도이머이의 특징은 국가의 경제 통제가 약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이를 ‘국가 능력’과 ‘울타리 허물기’ 개념으로 설명했다. 울타리는 국가가 통제하면서 시장이 들어올 수 없는 계획경제 영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이 울타리를 관리할 국가 능력이 부족했고, 암시장을 통한 자생적 시장화가 나타났다. 1986년이 되자 울타리 안팎이 사실상 시장 영역으로 변했다. 김태환 교수(국립외교원)는 “이미 쓸모없어진 울타리를 허물고 자생적 시장화를 사후 인준한 것이 도이머이”라고 설명했다. 외국 투자와 같은 외부 요인도 영향을 끼쳤다. 개혁개방 당시 중국은 화교 자본을 활용할 수 있었지만, 베트남은 국제금융기구에서 투자를 받아야 했다. 김병연 교수는 “국제금융기구가 투자의 대가로 요구한 자유화 조건들로 인해 베트남 정부의 통제력은 중국에 비해 약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특구 중심 개방과 달리 베트남은 전 국토를 동시에 개방했다. 중국에서 중앙정부가 특구를 지정할 권한을 갖고 개방을 주도했다면, 베트남에서는 지방 정부가 개방을 주도했다. 1992년과 1996년 외국인 직접 투자 조건이 완화되면서 각 지방 정부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제도적인 혜택을 제시했다. 김태환 교수는 “베트남에서는 지방 정부가 경쟁적으로 외자를 유치하는 아래로부터의 개방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는 베트남의 지방자치 전통과도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재완 연구원은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인데도 지방 분권이 발달했다”고 설명했다. ‘왕의 통치권은 마을 입구까지만 미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중앙정부 주도의 경제특구(EZ) 육성은 한 발 늦게 나타났다. 베트남 최초의 경제특구인 추라이 경제특구는 지방 정부 차원의 외자 유치가 이미 한창 진행되고 있던 2003년에서야 지정됐다. 특구의 성격도 중국과 달랐다. 정재완 연구원은 “베트남의 경제특구는 중국식의 개방 구역이 아니라 산업 집적지에 가깝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외국인은 베트남 내 어느 지역에도 투자할 수 있지만, 경제특구에 투자하면 각종 세금 혜택을 받는다. 이런 적극적인 외자 유치는 베트남의 경제성장에서 큰 역할을 했다.

3. 변화의 씨앗을 북한 땅에 심으려면

베트남의 도이머이는 최근 북한의 체제전환 시나리오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경제 제재가 풀린 북한이 유사한 상황이던 도이머이 초기 베트남과 비슷한 경로를 걸을 것이라는 기대다. 전문가들은 경제 제재 외에도 북한과 베트남 사이의 경제적 공통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완 연구원은 “중국은 국가 규모가 너무 커 북한이 벤치마킹하기 어렵다”며 “베트남 모델이 북한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태환 교수는 “북한에서는 1990년대부터 장마당을 통해 자생적 시장화가 이뤄지고 있고, 국가 능력이 약하다는 점에서 도이머이 직전의 베트남과 유사하다”며 베트남 모델의 북한 적용 가능성을 평가했다.

그렇다면 베트남 모델을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얼마나 현실성 있을까? 전문가들은 중국이나 베트남과 다른 북한만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선 농업을 들 수 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성공적인 농업 개혁으로 노동력이 풍부해져 산업화가 진행됐다. 김병로 교수(통일평화연구원)는 “북한 당국도 포전담당제*를 실시하고 기존의 작업반(20가구)보다 작은 단위인 분조(5가구)를 일부 도입하는 등 농업 개혁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시도는 중국, 베트남과 유사한 양상이지만 성급히 북한 농업 개혁의 성공을 예측할 수는 없다. 김병로 교수는 북한의 농업 개혁에 대해 “아직 작업반 단위가 지배적이고, 다른 단위를 조직할 제도가 미비해 실험 단계에 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작은 단위를 도입해도 문제가 남아있다. 김병로 교수는 “농업 개혁이 성공하려면 소유권을 포함한 전반적인 경제 체제 개혁이 수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시장에서 비료와 농기구를 사야 하고, 수확을 마치면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시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을 들여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정재완 연구원은 “식량 자급이 가능했던 베트남과 달리 북한의 개혁은 농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높다”면서 “자본을 투자해도 발전이 더딘 농업의 특성상 북한의 농업 발전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 전망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중공업이 주가 되는 북한의 산업구조가 체제전환 과정에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국과 베트남은 체제전환을 거치면서 농업에서 경공업 등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거기서 자본과 기술 집약적인 중공업 및 첨단 산업으로 나아갔다. 반대로 북한은 체제전환을 시작하기 훨씬 전인 1960년대부터 중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김태환 교수는 “북한은 이미 중공업 위주로 산업화 돼있어 베트남이나 중국보다 체제전환 초기에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라 설명했다. 중공업은 노동보다는 자본과 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산업이다. 북한이 중공업 제품을 수출한다면 자본과 기술이 월등히 앞서는 미국, 한국, 독일 등 선발 중공업 국가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 경쟁에서 북한은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고, 강점인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기도 어렵다. 세종연구소 양운철 북한연구센터장은 “북한은 중공업을 단번에 해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놔둘 수도 없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고 평가했다. 중공업은 비효율적이지만, 이를 해체하자니 경제 공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문제도 있다. 중국, 베트남, 북한은 모두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라 정치적으로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정권 내의 분권화 정도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정재완 연구원은 “베트남 공산당은 서기장, 주석, 총리가 권력을 분점해 집단지도체제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비교적 권력의 집중이 심하다. 정재호 교수는 “1959년 펑더화이가 숙청당한 이후 중국 공산당 내 견제와 비판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마오쩌둥 이후 지도자의 신격화 및 세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북한의 권력 구조는 극도의 권력 집중과 3대 세습이 특징이다. 이런 구조가 체제전환에 유리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정재호 교수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노선을 탈피해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었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정통성의 근간인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노선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김병연 교수는 “북한같이 강성한 독재 체제가 권력 유지에 위협이 되는 국제금융기구나 외국 자본을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밝혔다. 한편 김정은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구조가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었다. 정재완 연구원은 “1인 지배체제에서는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해 과감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같은 맥락에서 김병로 교수는 “젊은 나이에다 유학 경험이 있는 김정은의 개혁 성향과 북한의 권력 구조가 결합하면 체제전환 과정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고 밝혔다.

아무리 권력이 집중된 나라라도 개혁에는 보수파의 반발이 따를 수 있다. 중국 공산당 내 보수파들은 1989년 천안문 사태*와 1991년 소련 해체를 보면서 중국 공산당도 몰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에 반대했다. 도이머이를 추진한 응우옌반린 역시 개혁 정책을 추진하다 1983년 보수파에게 축출된 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사회 전반의 보수적 풍토가 개혁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김병로 교수는 “북한의 사회 분위기는 우리나라보다 경직되고 보수적인 풍토”라고 설명했다.

개혁을 결정하는 것은 지도자지만, 현장에서 정책을 집행하는 것은 관료다. 김병로 교수는 “김정은을 비롯한 소수의 엘리트는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만, 일반적인 경제 관료들은 시장 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자본주의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북한 경제특구의 실패가 있다. 북한에는 20개가 넘는 경제특구가 있으나 그 성과로 알려진 것은 미미하다. 김병로 교수는 “서구에서 유학한 소수의 경제학자들이 특구를 지정하지만, 관료들이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관료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인식 또한 중요하다. 덩샤오핑은 변화에 대한 사회 저변의 합의에 힘입어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도 가능한 일일까? 김태환 교수는 “북한 내 자생적 시장화의 수혜자들이 친개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무르익었다”며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김태환 교수는 장마당 상인뿐만 아니라 권력층도 자생적 시장화의 수혜자기 때문에 개혁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정적인 전망도 존재한다. 북한 시민의 절대다수는 1946년 북한 정부 수립 이후에 태어나 개인은 없고 국가만 있는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김병로 교수는 “아직도 많은 북한 시민들이 자본주의를 신념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의 특구 중심 개혁개방에서는 지역 간의 불평등이 나타났고, 베트남의 경우 시장 경제가 도입되면서 개인 간의 격차가 두드러졌다. 덩샤오핑은 선부론*을 내세워 불평등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김병로 교수는 “북한 사람들은 아직 불평등에 대한 정당화를 수용할 준비가 안 돼 있다”며 체제전환이 여론의 반대에 부딪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북한이 베트남식 체제전환을 받아들이는 것은 경제적으로 얼마나 현실적일까? 양운철 센터장은 “북한은 베트남식이나 중국식으로 체제전환을 하기에는 경제적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베트남 모델에 대한 주목을 경제가 아닌 외교 측면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양 센터장은 “북한이 베트남 모델을 언급하는 것은 중국을 압박하는 정치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베트남이 중국에 대해 독자적인 노선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냉전기 베트남은 한때 소련의 원조가 예산의 40%에 달하는 등 친소련 행보를 보였다. 도이머이 과정에서 서구의 투자를 주로 받았고 현재는 남중국해를 두고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북한이 베트남 모델을 언급하는 것은 중국에게 ‘베트남처럼 독자노선을 취할 수 있다’고 압박하는 처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4. 북을 향한 조심스런 한걸음

북한의 체제전환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 대한 고려가 빠질 수 없다. 화교 자본이 중국에 들어갔고 ASEAN 국가들이 베트남을 지원했듯, 북한의 체제전환에서 우리나라의 역할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김병로 교수는 “정책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북한의 미래에 대해 전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베트남처럼 시장이 상대적으로 강한 상태에서 전면적인 개방을 할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병로 교수는 북한의 여론이 불평등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북한은 국가가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는 국가 중심의 체제전환을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김병연 교수 또한 “북한은 정권의 취약성 때문에 경제특구에 차단벽을 두르는 형태로 통제된 개방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이 단박에 문을 열어젖히고, 무한한 가능성의 시장이 활짝 열리는 장밋빛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북한 체제전환 지원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인프라다. 인프라는 생산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지만, 생산을 뒷받침한다. 인프라에는 제도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있다. 제도적 인프라란 경제발전의 바탕이 되는 재산권, 소유권, 금융 질서 등의 법과 제도다. 북한에는 외국 기업이 투자했을 때 자본을 보호받고 수익을 회수할 수 있는 제도적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태환 교수는 “제도적 인프라의 미비로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하기를 꺼리는 상황에서는 여러 국가가 출자하는 다자기금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이 기금에서 북한에 진출하려는 기업들과 북한 내 자생적 사업가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물질적 인프라 역시 교통, 전력, 수도 등 상품의 생산과 분배에 필요한 많은 부문이 낙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운철 센터장은 “중국이 북한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인프라 부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인프라 개선을 누가 맡아야 할까? 김병연 교수는 “대규모 인프라 사업은 위험성이 크고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단독으로 할 수 없고, 주변국과 협력해 추진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인적 역량을 강화하는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양운철 센터장은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북한은 중공업에서 탈피해 노동집약적 산업부터 시작하는 구조조정을 해야한다”고 밝혔다. 양 센터장은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북한 노동자들의 교육과 고급 인력 양성을 도우면서 점점 높은 단계의 산업으로 이행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북한의 새로운 경제를 직접 운영할 경제 관료들의 능력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병로 교수는 “우리나라,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이 지식 공유로 북한 경제 관료들의 역량을 신장시켜야 한다”며 교육 지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여려 의견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체제전환을 어떻게 지원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김태환 교수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북한의 체제전환을 지원하는 것은 치기어린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김병연 교수는 북한이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경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지원이 낭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현재 우리나라의 대북 경제협력 방안은 이런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짠 것 같다”고 비판했다. 북한의 체제전환에 대비하려면 현재보다 훨씬 치밀한 계획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전환은 종종 냉철한 예측보다는 감정적인 기대를 낳는다. 기대는 막연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북한이 개방되면 유럽으로 기차 여행을 가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열악한 북한 철로를 수리할 노동자는 어떻게 고용하고, 건축 자재는 어디서 사들이고, 북한 당국의 허가는 어떻게 받을지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북한 체제전환의 이모저모에 대한 세부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약진운동: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추진된 중국의 농업 및 공업 증산 정책
*포전담당제: 농장을 맡은 농민들이 일부는 협동농장에 내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북한의 제도

*천안문 사태: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중국 공산당이 강경 진압한 사건

*선부론: 능력있는 사람이 먼저 잘 살고, 그들이 낙오된 사람들을 도우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덩샤오핑의 개혁방침

삽화: 손지윤 기자 unioni0310@snu.kr

레이아웃: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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