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자료를 읽던 중에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그린 ‘줴드폼의 선서’(Le Serment du Jeu de Paume) 도판이 눈에 띄었다. 간만에 이 작품을 접하니 그림 속 배경이 작금과 겹치는 것 같아 잠시 묘한 감정이 일었다. 1789년 6월 20일, 프랑스의 제3신분 평민들이 테니스장에 모여 의회를 결성하는 순간을 담은 이 그림은 사실 미완성작이다.

‘줴드폼의 선서’는 원래 프랑스 혁명정부가 의회를 장식하기 위해 다비드에게 제작을 의뢰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비드가 남긴 수많은 습작으로만 완성본을 짐작할 뿐인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다비드가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할 때쯤 프랑스 정세가 요동쳤기 때문이다. 그림 속 주요 인물인 바이이, 마라, 로베스피에르는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혁명 이후의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 못지않게 민생고도 극심했다. 정부가 주도한 아시냐 화폐개혁 정책의 실패로 물가가 급등해 식량난까지 발생했다. 주변 강대국들의 도발로 국제 관계조차 위태로워졌다. 혁명이념에 질린 민중들의 불신은 얼마 안 가 시골 출신의 한 군인에 대한 지지로 뒤바뀌었다. 이 일련의 사태를 목도한 다비드는 ‘줴드폼의 선서’ 제작을 영원히 포기하고 말았다. 유명 화가를 내세워 왕정 타도의 업적을 선전하려던 혁명정부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때와 장소는 바뀌어 2017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청와대는 경내에 한 민중미술 작가의 작품을 설치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청와대의 주요 인사들이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을 그린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저 그림이 우리 정부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대통령의 친절한 설명도 곁들여졌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그날의 성난 민심을 여전히, 그리고 온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현 정부의 집권 이후 등장한 난제들은 지금도 온 나라를 들쑤시고 있다. 북한 핵 문제, 국제통상위기, 커지는 빈부격차, 저소득층의 소득하락 등, 지금 이 나라에서 빚어지고 있는 많은 혼란에 대해 정부가 내놓는 대응책은 그 효과가 미미해 보인다. 뾰족한 대안이 없어 이들이 정적(政敵)이나 전 정권의 치부를 들춰내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면 그건 필자만의 비약일까. 그러나 최근 여러 지표에서도 민심의 변화는 분명히 감지된다. 민중미술 작품을 청와대 한가운데에 걸었던 586 정권의 자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빛이 바래고 있다.

“사람이 모이면 하늘을 이긴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 사람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초나라의 신포서(申包胥)가 갓 정권을 탈취한 오자서(伍子胥)에게 했던 경고다. 기세를 등에 업고 벌이는 정치도 자칫하면 한순간이다. 미술작품까지 내세워 자신들을 드높였던 이들이 지금의 난제를 훌륭히 극복해 역사의 승리자로 남을지, 아니면 불행한 운명의 휴브리스(Hubris)로 몰락할지 앞으로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김봉경

미술학과 박사과정·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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