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오늘날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지적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필립 길버트 해머튼은 『지적 생활의 즐거움』에서 자족을 목표로 하는 ‘지적 생활’과 인정을 목표로 하는 ‘정신노동’을 구분하면서, 지식 축적이나 성과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 나서는 여정으로서 지적 생활을 제시했다. 그것은 지적 노동을 하되, 일상 전체를 무대로 삼아 지성을 발휘하고 지적 탐구를 통한 즐거움을 향유하는 삶의 태도다. 단기간의 성과나 명예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진리를 찾아 나서는 생활 태도와 방식을 일컫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단순한 지적 노동과는 다르다.

이 책이 산업혁명의 절정기였던 빅토리아시대에 정신노동으로 삶을 소진시키는 지적 노동자들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왜 세속적 성과와 생존을 위한 지적 노동에 거리를 둔 지적 생활을 역설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지적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육체적 기반, 즉 건강을 꼽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책상에 붙잡혀 있기보다는 산책을 하며 시를 썼던 워즈워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연구하고, 산책하고, 잠을 잤던 칸트의 규칙적인 삶이 강한 의지로 지적 생활을 지켜내려고 한 면모로서 고평됐다.

그런데 사무실과 연구실, 골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현대인의 하루를 떠올려 볼 때, 지적 생활의 즐거움이란 요원한 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질문명이 번영하는 한편, 열악한 조건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던 그 시대는 분명 우리 사회와 닮기도 했지만, 다르기도 하다. 이제 생각은 지금 이 시대의 지적 노동에로 옮아간다. 성과주체들이 생산 극대화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소위 ‘피로사회’에서도 지적 생활은 지향되어야 할 고매한 삶의 태도일 테지만, 그것이 점점 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 정통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적 위주의 양적 평가가 만연한 우리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의 노력과 강한 의지만으로 지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너무나도 잘 안다.

해머튼이 말했던 지적 생활과 똑같지는 않지만, 새로운 지적 ‘노동’의 방식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호 『대학신문』에서는 콘텐츠를 직거래하는 ‘독립 연재’에 대한 취재기사를 실었다. 흥미로운 것은 콘텐츠가 유통되는 방식의 새로움뿐만이 아니라, 창작자나 독자가 그것을 노동으로 간주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독자는 창작 노동에 구독료를 지불하고, 창작자는 노동을 통해 매일매일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의 의의와 즐거움을 발견한다.

지식인의 위치도, 천부적인 재능과 영감을 통해 작품을 창조하는 낭만주의적 천재 예술가의 위치도 아닌, ‘노동자’로서의 자기규정은 시대적 변화의 징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세속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것만 같은 창작자와 예술가에 대한 신비화와 낭만화를 걷어버리고, 생존을 위한 지적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자성이 가려져 있던 예술가들의 노동자 선언이나 대학원생들의 노동자 선언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큰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의 노동은 삶을 혹사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지적 생활을 실천하고 이어가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 환경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지적 생활을 이어가려는 지적 노동자들의 분투를 응원하고 싶다.

유예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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